[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스타시스템’ 과 ‘Apga 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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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첫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나오면 담당의사는 영아의 이모저모를 체크한 후 ‘표찰’을 부쳐 신생아실로 보낸다. 물론 이 표찰에는 아이의 성별과 체중, 태어난 시각과 부모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심장박동 속도, 피부색깔, 호흡상태, 울음소리, 그리고 엄마의 젓꼭지에 대한 반응도등 다섯 항목을 출생 후 1분과 5분후에 체크해서 ‘표찰’에 기록한다.
각 항목은 상태에 따라 좋음 2점, 보통 1점, 나쁨 0점으로 기록되는데, 점수의 합이 7이 넘는 아기는 올림픽경기에 출전할 훈련을 시켜도 좋을 정도이고, 4점미만의 아기는 의학이 제공하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의학계에 통용되는 이 표찰의 이름은『Apga score』
이를 창안한 virginia Apga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으로 50년 남짓 되었다.

그 이전엔 아기 상태를 그냥 뭉뚱그려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식의 피상적인 말로 표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3년에 산부인과 의사인 Apga박사가 처음으로 이 ‘시스템’을 창안한 후부터 전 의학계에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시스템’ 덕분에 그전까지 엄청나게 높았던 영아의 사망률이 현저하게 줄게 되었고, 그 까닭에 ‘Apga score’도 사망하지 않는 의학계의 유명용어중 하나가 되었다.
취임하자마자 “시스템이 대통령입니다!”라고 역설한 대통령.
그가 시스템을 강조한 까닭도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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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계는 어떤가?
방송의 다양한 장르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Apga’의 표찰처럼 시스템적인 장치들은 얼마나 또 어떻게 운용되고 있을까?
나는 ‘한류’를 생각할 때마다 ‘Apga score’가 떠오른다.
얼마 전까지 “한류,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한다.”며 도하의 신문들이 긴 나팔을 불어댈 때, 그 나팔소리에 비례해 내 맘속 불안감도 높아갔던 것은 한류가 ‘시스템’에서 나온 열풍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한류’는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방송역사와 특별한 제작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 필연적 산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몇몇 작가와 PD의 투철한 작가정신과 장인정신, 그리고 몇몇 개성파 배우들의 Persona가 절묘하게 시대 흐름과 결합해서 이룩한 결정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 ‘한류’라는 열풍 속에는 ‘무역풍’처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시스템적 요소를 찾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한류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우리의 방송계에도  인구에 회자되는 ‘시스템’이 있다. 이름 하여 『Star system』
얼마 전, 한 드라마가  회당 제작비의 1/3 가까이 되는 수천만원을 뚝 잘라 한 여배우께 바치고 캐스팅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사건’을 '스타시스템'이라 부를 만한데, 보통배우의 열배가 넘는 ‘개런티’를 받은 이 스타는 드라마가 끝난 후 흥행이 개런티 되지 못하자 PD와 작가 탓에 드라마가 실패했다는 보도 자료를 언론에 돌렸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작비의 1/3 정도를 배우 한명에게 투입하는 PD와 작가는 뭔가 잘못한 건 분명한 것 같다.

시스템이 아무리 중요 요소라 할지라도 한두 명의 스타를 확보해서 드라마를 만들려는 것은  하의 하책 시스템이다. ‘스타시스템’만으로 드라마의 성공과 발전, 한류의 지속을 앙망한다는 것은  거의 ‘미신시스템’에 가까운 일이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즐기고 있는 이방사람들이 ‘한류’의 미래를 걱정하며 전해 온 말이기도 하다.
‘한류’가 지속되려면 지금부터라도 방송의 “아프가 스코어”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방송현장의 기획과 제작 과정에서 지금과는 다른 방식이 모색되어야 하고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아를 항목별로 체크하듯 프로그램 기획 초기단계에 영아상태인 아이디어의 신선함과 독창성, 소재의 매력성과 주제의 보편성, 탄탄한 스토리 전개와 예측불허의 극적장치들을 체크하거나 계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방송의 ‘Apga score’를 만드는 일 아닐까?
그 시스템의 바탕위에 개성 있는 Persona를 가진 배우와 Star를 캐스팅해서 스타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일의 순리이며 전략 아닐까?
그런 연후에야 ‘한류우드’도 존재하고 ‘한류아카데미’도 존재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술과 문화 같은 창작의 분야에선 ‘시스템’도 문제를 야기한다.
‘한류’를 즐기는 이방인들 중에는 얼마 전부터 우리드라마의 구태의연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결함들을 입방아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출생의 비밀과 혈연간의 어긋난 사랑, 시한부 생명과 기억상실증, 신데렐라적 신분 상승과 이를 둘러싼 암투 같은, 지금 한국 드라마가 양산해내는 진부한 클리셰(cliche)를 기계적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어서는 곤란하다.
일찍이 러시아 예술가 스타니슬라브스키가 경고한 바 있다. “철학(논리 혹은 시스템)이 출발하는 곳에 예술은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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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늘 두렵다! 예술혼과 장인정신도 빈약하지만 나의 처절한 시스템 부재에 대해서.
이번 ‘스타시스템’의 후유증을 보면서 느끼는  방송과 스스로에 대한 감상이다.

 


이응진 / KBS 드라마팀 PD , 문화칼럼니스트


 대표작으로 1994년 최수종과 배용준. 그리고 이승연,최지우가 출연한드라마 <첫사랑>과 <딸부자집> 등이 있으며  2004년 KBS 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HDTV 문학관' 을 제작 중이다.  '타블라 라싸'는  흰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순백의 상태를 말하듯 철학자 로크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 말을 사용했다. 흰백지 위에 생각을 쓰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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