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수의 방송 맛 보기] '전국노래자랑'과 남도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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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에 눌려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적이 있다. 이승엽 인터뷰를 위해 동경행 비행기 표를 끊어 놓은 상태였다.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울렁거리는 어지럼증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다. 출장 하루 전 후배에게 전화해서 대신 출장가라고 이야기하고, 선배에게 상태를 보고했다. 일주일동안 쉬겠다고 했다. 그러라는 허락을 받고는 집에서 쉬다가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혼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쉬워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아무 이야기 없는 독백의 시간들……. 흘러가는 차와 사람들 사이에 나의 존재가 도드라진다. 나도 흘러가고 있는 부부자(浮浮者)다.

늦은 아침을 먹어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나주로 향했다. 네 시간여 지나 도착한 나주. 곰탕집을 찾았다. 하얀 집에서는 두 번 먹었다. 다른 집에서 먹어보고 싶어서 남평집을 찾았다. 매일시장 한 구석에 자리한 식당은 시장 분위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푹푹 끓이는 무쇠 솥이며, 식당 앞 길가에서 음식 손질하는 아주머니, 세월의 더께 내려앉은 식당 안. 그 속에서 만든 맑은 곰탕이 나왔다. 노란 계란 지단을 가늘게 썰어 고명으로 얹고, 약간의 고춧가루와 볶은 참깨가 더해졌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이 맛을 어떻게 설명할까.

오후 네 시가 되어 먹는 점심이 맛없을 리 없는 것 아닌가 계속 의심했다. 새벽부터 계속 끓이고만 있다는 국물은 시간이 늦을수록 고소함이 더해진다. 쇠고기가 많이 들어있어, 수육을 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풍부한 인심. 함께 나온 무김치를 베어 먹으며 국물을 남김없이 먹었다. 작지만 부러울 것 부족할 것 하나 없는 행복한 잔치에 단지 6,000원 소요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원래 어머니가 시작하신 식당을 따님이 맡고 있다는 이야기, 어머니는 기신하기 어렵게 와병중이라는 이야기, 나주평야에서 나온 쌀과 한우가 곰탕의 바탕이 되었다는 이야기……. 오랜 세월 장꾼들의 속을 따뜻이 달래 주었을 곰탕 한 그릇의 역사가 그대로 전해졌다.

강진으로 향했다. 무위사에 가기 위해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읽기만 하고 가보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 초여름의 남도. 일요일 해름 즈음이라 인적이 드물다. 나지막한 산속에 자리한 절의 입구에서 발이 멈춰졌다. 바위 계단 위에 서있는 기와절집. 일체의 단청을 하지 않아 원목의 색깔 그대로다.  절의 오른쪽을 가리며 올라와 있는 고목은 약간의 수줍음처럼 느껴졌다. 아, 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커서 웅장하지도 않고, 화려하게 색칠하지도 않았다.

가까이서 본 절은 더욱 마음을 저리게 한다. 상하 좌우의 비례가 적절하고 균형감도 뛰어나다. 앞면 측면 후면 어디를 보아도 딱 떨어지는 규모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이 카메라가 된 양, 이곳저곳 자리를 바꿔가며 조망했다. 적막한 절집에서 아름다움에 반하여 마음속에 계속 새겼다. 덧칠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나도 이렇게 늙고 싶다.

40년의 세월, 나는 크고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것을 열망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고 싶어 하나, 좀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모순. 더 좋아 보이는 자리를 바라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내 자신을 세우고 이름을 휘날리고자 했던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아니, 무위사가 나를 찬찬히 지켜보았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장흥으로 향했다. 강진에 면한 장흥은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대덕으로 향해서 아침 먹을 식당을 찾았다. 오일장 때문인지 대덕읍은 붐볐다. 덕일 식당을 발견하고는 아침식사가 되냐고 물었다. 혼자 오는 아침 손님이 반가울리 없지만 방안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리고는 5,000원짜리 백반이 나왔다. 12가지가 넘는 다양한 반찬이 큰 쟁반 가득 나왔다. 가득담은 더운 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까지.

 
▲장흥 덕일식당에서 사온 쌀로 만든 밥 ⓒ홍경수 
밥은 찰지고 반찬은 깨끗했다. 양념게장이며 구운 고등어며 해산물과 산채 나물까지 이것저것 먹느라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반찬이 아쉬워 밥 한 그릇을 추가했다. 내 뒤를 이어 들어온 충청도말을 쓰는 떠돌이 장꾼에게도 똑같은 백반 1인분이 나왔다. 그나 나나 지금은 집과 고향을 떠나온 떠돌이 신세. 이들에게 공평하게 따뜻한 아침식사를 주는 이 식당과 주인께 감사했다. 추가한 밥값은 더 받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듯한 마음씀씀이가 큰 힘을 준다. 손님을 진정한 손님 대접 해주는 식당이 있어 여행자의 마음이 훈훈해진다.

식당에 쌓인 쌀을 보고는 주인에게 팔라고 했다. 밥이 너무 맛있어서 꼭 사고 싶다고 했다.

주인은 팔기 곤란하나 서울서 온 손님이 원하시니  가져온 값에 주겠다고 했다. 40킬로 쌀을 75,000에 구입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그 쌀로 밥을 해먹었다. 반짝 빛나는 윤기와 흐트러지지 않는 모양새……. 맛있는 쌀은 식당 주인의 인심으로 더욱 맛있고 내 몸은 회복되어 감을 느꼈다.

한참 뒤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했다. 함께 한 사람들 때문에 즐거운 자리였으나, 음식 맛을 궁구하던 내게는 장흥 대덕의 5,000원짜리 백반이 계속 떠올랐다.

이 백반을 무슨 방송 프로그램에 비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뉴스일까, 드라마일까, 다큐멘터리일까? 쇼 프로그램에서 답을 찾았다.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를 비추는 조명을 쓰지 않고 대낮에 야외를 무대로 하는 것이 조미료를 치지 않는 맛과 닮았다. 화려한 연예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이 주인이 되는 것도 한정식보다는 백반 쪽이다.

음악프로그램이 내리막길을 걷는 와중에도 전국노래자랑은 건재하고 있다. 곰탕이나, 무위사나, 백반이나 별로 화려하게 덧칠하지 않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전국노래자랑〉도 별다른 장치 없이 고령의 진행자 송해 씨의 살가운 진행으로 아름답기만 하다. 누가 나오더라도 눈높이에 맞춰서 응대해주는 진행과 아직도 약속시간 30분 전에 약속장소에 와서 기다리는 송해 씨. 누군가가 만들 다큐멘터리 송해를 보고 싶다. 음식이나 방송이나 좋은 맛 밑에는 마음이 있다. 따뜻한 마음. 우리는 마음을 먹고 보는 셈이다.


홍경수 KBS 〈단박인터뷰〉 PD


현재 〈단박인터뷰〉를 연출하고 있으며,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한다. PD지망생들을 위한 < PD, WHO & HOW >를 대표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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