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의 조준선 정렬] 인문학적 상상력이 해법이다
상태바
[정길화의 조준선 정렬] 인문학적 상상력이 해법이다
  • 정길화 MBC 대외협력팀장
  • 승인 2007.10.04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는 6월항쟁 20주년의 해다. 우리 사회가 독재와 폭력의 억압에서 벗어난 87년 체제 이후 이미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간다운 사회를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러나 냉정히 응시하면 지체와 혼선이 더 많다. 올해가 IMF 외환위기 10주년의 해임을 환기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겸손해야 할 일이다. 외환위기가 1997년 12월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를 야기했던 지나간 오만과 낭비의 시간은 모두 우리들의 몫이다. 더욱이 예방저널리즘이 부재했던 언론의 후안무치와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요설(饒舌)의 정치가 주는 환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2007년에는 대선이 있다. 박빙의 대결을 두어 차례 겪은 이후 여야는 다시 ‘올 오어 나싱’의 건곤일척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으로 가는 축제가 아니라 패자에게는 승복하지 않는 증오를, 승자에게는 합법적인 교만을 부여하는 불행한 의례(儀禮)로 우리의 선거는 변질되고 있다. 올 한해 내내 불신과 대립을 일삼고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12월 어느 날에 벌어지는 거대한 한판의 ‘투전’을 감내할 여력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가. 
 
작금 이같은 우리 사회의 중심없는 쏠림과 부유(浮游)에 방송의 책임은 막중하다. 방송이 좀더 잘 한다면 상황은 한결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돌이켜 보면 시민과 학생의 희생으로 성립된 87년 체제는 이 땅의 방송에게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신장할 소망스런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방송은 여기에 무임승차했고 그 원죄는 컸다. 방송이 그 새로운 역할에 선도적으로 적응하기도 전에 주변 환경은 급변하였다. 권력의 바람벽이 주는 안온함이 해체되고 다매체 다채널 속에서 이제는 스스로 생존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뉴 미디어에 대해 내보인 지상파의 오만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한다는 등의 명분 하에 추진되는 방통 융합은 보편적 서비스를 근간으로 하는 지상파 방송의 핵심인 공익성마저 무너뜨릴지 모른다. 철학의 부재, 정책의 개념 상실이다. 도처에 지상파 흔들기가 만연하고 있고 정파적인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공영방송 때리기는 정도를 넘어섰다. 살아남기에 급급한 지상파 방송은 시청률과 광고를 향해 부나비처럼 뛰어들고, 이는 다시 방송사간 소모적인 경쟁으로 이어진다. 이는 방송의 의제설정력을 현저히 손상함으로써 급기야 정체성의 혼란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러한 가운데 피디연합회는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그러고 보니 피디연합회도 87년 체제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하겠다. 피디연합회 역시 사실상 무임승차를 했고 지난 20년의 ‘쏠림’과 ‘부유’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연합회가 그 동안 언론운동단체로서 나름대로 활동한 바의 성과는 없지 않을 것이다. 또한 피디들은 ‘방송문화의 생산자’를 자임하며 한류콘텐츠의 선풍을 선도했다고 자부할 만하다. 그러나 어느 사이 거대 연예자본과 스타 마케팅의 잠식과 발호 속에서 이제는 초라한 위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와 기술결정론의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작금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미디어들이 시청자의 행복에 이바지할 것인지 혹은 정녕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인지는 전혀 검증되지 않고 있다. 눈덩이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DMB가 그렇고 대기중인 IPTV나 와이브로도 그 운명을 알 수 없다. 생산요소의 과잉이나 중복 여부 또한 따져봐야 하건만 장밋빛 전망의 와중에서 업적에 목마른 정치권과 기술의 내적 논리로 일관하는 테크놀로지가 결합한 가운데 질주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의 방송은 권력과 자본, 테크놀로지의 3각동맹이 콘텐츠의 창의적인 생산력을 위협하고 있고 피디와 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에 포위되어 있다.
 
 피디연합회 20년은 그 전락(轉落)의 과정을 엄중하게 성찰해야 한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의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법은 이제는 빛바래어 정의조차 힘든 ‘인문학적 상상력’임을 믿어본다. 해법의 창구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너무나 잔혹하다. 상상력.. 정녕 우리의 해법이 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자유롭게 상상하고 있는가.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한 심포지움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불기(不器)의 상상력’으로서 “감정이입과 자기 입장을 초월하며, 공리적 목적에서 어느 정도 초연한 상상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게 조작의 대상이 된 오늘날의 관리사회에서 ‘불기의 상상력’이야말로 인간화된 사회를 위한 도덕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어렵다. 신성장동력과 블루오션의 선점효과를 위해 줄달음치는 21세기 한국에 '불기의 상상력'이라니 당치도 않을 일이다. 그야말로 길은 있는데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다 죽을 것인가. 20주년을 맞은 연합회의 과제는 막중하기만 하다. 
  

정길화 MBC 대외협력팀장 / 12대 PD연합회장


1984년 MBC 입사. <인간시대> < PD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네껜> 등 연출. 임종국상, 통일언론상, 방송대상, 한국언론대상 등 수상. MBC 홍보심의국장과 특보겸창사기획단 사무국장 역임. 저서로는 <3인3색 중국기>,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