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의 조준선 정렬] ‘승희 조 사건’ 의 수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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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설마 했는데 버지니아공대 32명 학살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1.5세 동포 학생으로 드러났다. 참으로 난감하고 당황스런 심정은 한국인이면 대부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하인즈 워드에 열광하고 박찬호 선수의 활약상에 긍부를 가졌던 것과 꼭 같이 이 사건에 반응하였다.

그것이 ‘일반화의 오류’든 ‘나이브한 민족주의’든 많은 한국인들이 사고하고 행위하는 방식임은 부인할 수 없다. 토플 대란이 일어나고 집집마다 몇 다리 건너지 않아 어떻게든 미국과 관련을 맺고 있는 21세기 한국인의 삶의 조건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저 송구스럽고 미안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미 한국 대사가 했다는 ‘사죄(apology)' 발언도 이해는 간다. 현지의 추도모임에서 - 미국인들도 참석한 - 거의 자발적으로 우러나서 한 말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특명전권대사’로서 적절한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사건 직후 창졸간의 참담함 속에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한국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미안하다(We feel vey sorry.)라고 했을 뿐 사죄한 적은 없으며 그것은 번역상 문제..”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까지 수긍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주미 대사가 한 발언과 처신의 부적절성은 여러 경로로 지적되고 있어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다.

정작 미국의 언론은 한국에게 더 이상 사과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한국인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사과의 홍수’에 오히려 당황했다고나 할까.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는 ‘한국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은 한국인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이민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국에 있다”고 짚고, “제발 사과를 멈춰 달라.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썼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 그들은 개인의 문제를 국민 혹은 민족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한국적 방식이 낯선 것일까. 혹은 한인 이민사회에 대한 보복을 우려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알아차리고 이를 불편해 하는 것일까.
 
실제로 예의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의 사설은 “우리는 당신들이 미국 내 한인들에게 오도된 역작용(misdirected backlash)이 있을 것이라 걱정하는 데 대해선 실망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미국이 그보다는 나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글쎄, 일부 한국인들이 미리 겁먹고 ‘과공’한 측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날 봉건시대 때 동헌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서슬에 놀라 수령앞에 고두사죄하며 있는 일 없는 일을 죄다 이실직고하던 무지랭이 백성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러나 이는 한국인의 이심전심 자구적인 방어의식의 일환이랄 수도 있다. 미국인들도 인정하고 있듯 2차 대전 당시 미국에 있던 일본계 이민자들이 받은 오해와 고통, 9.11 이후 아랍계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받은 편견과 부당한 대우 등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한국인들의 반응이 그렇게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국이 (한국인들이 우려하는) 그보다는 나은 사회'라는 것을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5년 전 로드니 킹 사건 이후 이것이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한흑간 인종갈등으로 비화되었는지를 우리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인 이민사회가 ‘승희 조 사건’ 이후 이로 인해 증오범죄를 당하고 차별을 받거나 향후 한국유학생들의 미국입국이 까다로워지고 나아가 비자면제협정 체결에까지 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칙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우려였다고 본다. 정녕 기우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인들이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총기 소지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2조의 문제점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사회의 저력이고 선진사회의 미덕일 것이다. 한편 재미 한인사회가 이민 커뮤니티에 만연해 있는 가족 구성원간 소통의 부재, 그리고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는 학벌 만능주의나 결과지상주의를 직시하고 성찰하는 것은 이제 한국인들의 몫이 될 것이다.

부디 제2, 제3의 승희 조 사건이 한인을 포함한 소수 이민 사회는 물론 미국내 주류 사회에서도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 말처럼 미국 역사는 젊고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We're young, still learning.). 그리고 한인 사회의 역사는 더욱 짧다. 배울 것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 수업료가 너무나 참담하고 가혹하다.

 

정길화 / MBC 대외협력팀장 , 12대 PD연합회장  


1984년 MBC 입사. <인간시대> < PD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네껜> 등 연출. 임종국상, 통일언론상, 방송대상, 한국언론대상 등 수상. MBC 홍보심의국장과 특보겸창사기획단 사무국장 역임. 저서로는 <3인3색 중국기>,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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