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의 조준선 정렬] 기록의 힘, 증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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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식씨 진술은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 초급간부의 첫 증언으로 큰 의미

“최초의 보도연맹원 처형은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강원도 횡성에서 이뤄졌다.”

“처형 명령은 무전을 통해 대통령의 특명으로 받았다”

 “6월 27일 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를 직접 받았다.” 

“보도연맹원 소집은 각 경찰서별로 이뤄졌고, CIC(방첩대)가 보도연맹원 심사를 해 처형과 석방을 결정했다. CIC는 보도연맹원을 A·B·C급으로 분류, A급과 B급은 무조건 처형시켰다. 헌병대는 경찰서로부터 보도연맹원을 인계받아 처형했다. 처형은 주로 연대 헌병대가 주관하고 보병과 경찰 병력의 일부를 지원받았다.”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 중에는 아주 순박하고 어진 평범한 시민과 농민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가명령에 따라 처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관련 기사 발췌 인용)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다. 너무도 생생한 육성 증언이다. 지난 7월 4일 6.25 당시 6사단 헌병대 소속이었던 김만식씨(81)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이하 충북대책위)에서 주최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가해집단에 관한 충북대책위 기자회견’에서 직접 밝힌 내용이다. 김씨의 진술은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 초급간부의 첫 증언이다. 이번 증언은 보도연맹원 처형을 대통령 특명으로 받았음을 밝히고, 그동안 첫 처형일이 7월 1일로 알려져 있던 것을 6월 28일로 앞당기게 하는 등 여러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김만식씨는 헌병대 상사로서 강원도 원주와 경북 영주에서의 보도연맹 학살 현장에 있었으며 총을 쏘기도 한, 말하자면 가해집단의 일원이다. 한편으로 그는 1950년 7월 대구 다부동 전투에 '육탄결사대' 소대장으로 참전해 전과를 이룬 공로로 헌병대에서는 처음으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56년 육군대위로 예편해 대한무공수훈자회 초대충북지부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전력은 증언의 신뢰성과 동기의 진정성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를 확보해 준다. 최소한 색깔론 시비는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영웅이요 국가유공자 아닌가. 그는 “조국을 사랑했기에 몸과 마음을 바쳐 전투에 참여해 전과를 올렸지만 보도연맹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팠다”며, “인권 회복 차원에서라도 무고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는 거름이 되는 마음으로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한겨레 기사). 김씨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한국전쟁 중 최대 비극 중의 하나로 꼽히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2001년 MBC 이채훈 PD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보도연맹 2부작 - 1부 ‘잊혀진 대학살’, 2부 ‘산 자와 죽은 자’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기실 이 프로그램은 담당 피디의 첨예한 문제의식과 집요한 천착을 통해 보도연맹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는 거의 접근했다고 본다. 대전교도소 교도관이나 경찰 지서 주임 등의 증언과 예비검속을 적시하는 경찰의 전언통신문 등을 어렵사리 확보, 최초로 공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권력의 최상층이 명령하고 결정했음을 자명하게 하였다.

프로그램 ‘잊혀진 대학살’에서는 이 같은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명령 계통도를 정리했다. 경찰의 지휘권은 내무부 장관에게, 형무소 수감자들에 대한 권한은 법무부 장관에게, 군대의 지휘권은 국방부 장관에게 있었고, 최고 결정권자는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서중석 교수는 “보도연맹을 수속하고 처형하는 과정을 보면 매우 일사불란한데 이는 최고위층의 재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진단했다.    

김만식씨는 처형집행을 맡은 입장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사실관계의 확인에 있어 사실상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있다. 앞으로 보다 책임있는 상급 위치에 있던 이의 추가증언을 확보한다면 학살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 더 용이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직 생존해 있을까. 김씨의 올해 나이는 81세, 6.25 당시에는 24세였다. 더 상급자라면 필경 김씨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균수명을 고려할 때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더 많겠다. 

이번에 김만식씨의 증언 기사를 보고 있자니 2001년의 일이 자꾸 생각났다. 나로서는 뼈아픈 기억이다. 이채훈 PD가 보도연맹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을 때, 함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의 일원이었던 나는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편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1949년 6월에 와해됐다. 이제는 반민특위와 직접 관련되는 생존자가 많지 않다는 것에 감안해, 그들의 육성증언을 체계적으로 담아 다큐멘터리로 남기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반민특위를 취재하려면 당시 친일파를 비호하고 나아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척결을 방해했던 이승만 정권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생존해 있던 제1공화국 관련자를 수소문하던 중 찾은 이가 장석윤씨(당시 97세)다. 그는 해방 전 OSS(CIA의 전신)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종전 후 미군정 고문관을 거쳐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제7대 내무부장관(1952. 01- 05)을 역임했다. 당시 생존자 중에는 가장 유력한 제1공화국 관련자라 할 만했다. 미군정기나 이승만 정권과 관련된 현대사 다큐멘터리에서 주요 인터뷰이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다행히 섭외가 이루어져 인터뷰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장석윤씨가 1950년 6월 당시에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당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의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고, 그 직후 내려진 ‘요시찰인 단속 및 형무소 엄중 경비’건과 6월 28일의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명령이 바로 치안국장의 명의로 발송됐다. 그는 보도연맹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엔 더없이 확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다 파악하고 있던 이채훈 피디는 장석윤씨에 대한 섭외가 여의치 않자 내게 부탁을 해왔다. “반민특위나 이승만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 보도연맹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의 두 문건을 인터뷰 자료로 주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뷰 막바지에) “하나만 더 여쭈어 볼 게 있는데요… 6.25 때 치안국장으로 계시면서 그 저 뭡니까.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하지 않았나요?”

“그건 나는 모르겠는데…”
(그러자 치안국장명으로 발송된 예의 ‘요시찰인 단속…’ 및 ‘예비검속’에 관한 명령서 사본을 보여주면서)

 
“여기 당시의 명령서가 있습니다만…”

“뭐 글쎄 누가 사인한 건지는 모르시지?”

“여기 치안국장으로 돼 있습니다…”

“그거를 특별히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공산당은 요시찰인이니까… 좌익은 전부니까…” 

 “치안국장 명의로 돼 있는데, 그때 치안국장 아니셨나요?”  “6월 25일이면 내가 맞는데…”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습니까? 생각나시는 거 없습니까?”

“생각나는 거 없는데… 기억이 없는데…”   
 
프리뷰 노트와 대본으로 재구성해본 인터뷰 상황이다. 고백하건대 인터뷰는 실패했다. 변명하자면 우선 고령이라 진행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04년 갑진생인 장석윤씨의 당시 나이는 97세, 우리 나이로 98세다. 어눌한 말투, 흐려진 기억을 갖고 있는 노인을 상대로 각박하게 들이대기는 적절하지 않았다.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시는데 어쩌랴. 그동안 각종 청문회에서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는 진술을 워낙 들어와 만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예 입을 닫고 있는 노인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하릴없이 철수한 기억이 선연하다. 이채훈 PD는 ‘기억이 안 난다’는 대목이라도 어쩔 수 없이 편집해 방송하며, 특종을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이때가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매우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이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장 전 장관은 그로부터 2~3년 뒤엔가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날 인터뷰 때 “당시에 예비검속을 어떻게 집행했는지 사실관계만 좀 설명해 주세요…”하면서 간곡히 호소하고 더 기다려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이번 김민식씨 증언 정도는 그때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 되면 다음에 한 번 더 오겠다는 심정이었는데 이는 오산이었다. 그러기에 증언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가장 큰 적은 세월이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에게는 영생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재판도 없이 보도연맹원- 전쟁 전에 임시관리용으로 급조된 -이라는 이유만으로 낮게 추정해도 최소 10여 만 명을 처형했던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반세기가 넘도록 그 진상과 전모는 다 드러나지 않았다. 집행 과정과 내용도 밝혀져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자행되어야 했는지 동기와 목적이다. 전면적인 전시 상황 - 그것도 패주하고 있던 - 에서 당시의 위정자들은 이적성(利敵性)이 있는 요시찰인을 신속하게 예방적으로 처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한국전쟁기 남한의 민간인 학살의 유형과 성격’을 발표한 목포대 정병준 교수는 “보도연맹원과 수감자를 학살한 표면적인 이유는 이들의 이적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지만 한국 정부의 핵심세력이었던 군경 우익의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전쟁 중 한국의 군경 가운데 적에게 투항한 경우가 없다는 것이 학살의 ‘효과’를 말해준다는 것이다(블로그 ‘내가 모르는 나’에서 재인용). 야만과 폭력의 시대, 광기가 지배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시대의 모순과 한계를 응시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후대에게 주어진 거역할 수 없는 과제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출발은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있다. 그 토대는 말할 것도 없이 기록과 증언이다. 생존본능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대로,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대로, 소신과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면 역시 그대로 민족과 역사 앞에 낱낱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과정을 진술한 김민식씨의 이번 증언은 참으로 소중하다. 


문득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제작할 때 한사코 증언을 거부하고 마침내 돌아가신 분들이 생각난다. 취재에 실패하고 신문의 부고란에서 이름을 발견할 때의 낭패감과 아쉬움. 섭외는 거절당하고 카메라는 문전박대의 수모를 겪는다. 민간인 학살, 독재에 굴복 또는 편승, 인권 유린, 언론 탄압, 배신과 음모…. ‘지금도 말할 수 없다’, 또는 ‘끝까지 말할 수 없다’던 이들. 종당에는 무덤까지 안고 갈 정도로 그들에게는 진실의 무게가 그토록 엄중했던 것일까. 혹은 그들에게는 진실을 알리는 공포가 그렇게 가혹했던 것일까.    

이번 일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절감하는 것은 기록과 증언의 힘이다. 사실의 위력, 진실이 주는 파괴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천망(天網)은 회회(恢恢)하나 소이불루(疎而不漏)”라는 오래된 교훈을 떠올린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커서 성긴 듯해 보이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이 시대에 ‘하늘의 그물’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전파의 메타포인 것만 같다. 천망을 물리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전파 곧 방송이다. 대기권에서 성층권까지 하늘은 전파로 가득하다. 방송은 하늘의 그물이 되어 놓치는 것 없이 오로지 진실의 포획망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김만식씨를 찾아야 한다. 그 일은 아무래도 이 땅의 방송이 그중에서도 지상파 공영방송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누가 또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보도연맹 사건은? 1949년 6월 좌익인사의 교화와 전향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로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보도연맹에 소속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檢束)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6·25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최소 10여만명이 살해당했다. 전쟁 중에 이 조직은 없어졌지만, 학살에 관한 명확한 진실규명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길화 / MBC 대외협력팀장 , 12대 PD연합회장


1984년 MBC 입사. <인간시대> < PD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네껜> 등 연출. 임종국상, 통일언론상, 방송대상, 한국언론대상 등 수상. MBC 홍보심의국장과 특보겸창사기획단 사무국장 역임. 저서로는 <3인3색 중국기>,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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