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현의 한반도 24시] 퍼주기 논란을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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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 중국 산뚱성의 칭다오를 찾아 갔을 때 정인화 할아버지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팔순이 넘은 한국의 기업가인데, 회사수익 중 상당부분을 종업원들의 복지를 위해 써서 현지인들의 칭송이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화류 속의 한류”라는 제목으로 중국 속의 한국인들의 활동 모습을 취재하던 나에게는 흥미 있는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현지 한국인 경제단체의 추천을 받은 터라서 반신반의하면서도 종업원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른다는 말에 취재를 결정했다.
 
  칭다오 시내를 벗어나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칭다오 경제개발구의 남애전자 현지 공장에서 정인화 할아버지를 만났다. 300명이 넘는 종업원 전체에게 출퇴근용 자전거를 사주고, 10년 장기근속자 30여명에게 고급아파트를 사준 일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린 종업원을 위해 회사부설 야간고등학교를 세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업을 계속하게 한 일 등은 ‘자랑스러운 한국기업가’의 모범으로 내세워 방송하기에 적절했다.
 
 그러나 당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그가 북한에 공장을 세웠다는 점이었다.
  아직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인 1997년 그는 북한의 희천이란 곳에 부품조립공장을 설립했다. 직원 30명 정도의 크지 않은 공장이지만 그 당시에 북한에다가 그리고 평양인근이 아닌 자강도 산골에 공장을 세웠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단지 수익만을 위해 북한에 공장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북한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50년 말 한국전쟁에 하사관으로 참전하면서였다.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그는 중국인민해방군에 포로가 되었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처형 직전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지역이 현재의 희천부근이었다. 중국에 공장을 세우거나 북한에 공장을 세운 일 모두 자신의 젊은 시절 겪었던 아픈 사건에 대한 치유이자 보은의 의미이기도 했다. 

  2000년 7월, 6.15정상회담 직후 그는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자신의 공장을 둘러 볼뿐 아니라 북한경제의 발전을 위해 중국 칭다오경제개발구 발전모델을 북한에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30명 직원 모두에게 줄 선물을 일일이 챙겼다. 평양에 도착한 그는 끈질긴 요구 끝에 겨우 반나절 거리의 희천공장을 방문할 수 있었으나, 직원은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전 직원을 휴가 보냈다는 것이 북한 안내인의 설명이었다.
 
 중국의 경제개발특구 모델을 북한에서도 도입해보라고 의욕 차게 제안했으나 ‘정치적 발언’하지 말라는 경고만 받았다. 그가 마련한 선물은 자신의 종업원과는 무관한 안내인에게 모두 건네졌다. 평양순안비행장을 이륙하면서 그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희천공장을 폐쇄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조립단가가 중국의 1.5배에 달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했다. 그가 가슴아파하는 것은 희천 방문 중에 만난 북한의 어린이 모습이었다. 영양부족으로 남한 어린이 보다 3~4살 적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 식량을 보내는데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대로 갔다가는 우리 민족의 ‘씨’가 나빠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식량이 군용미로 이용될 수 있지 않느냐는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입장은 단호하다. 어느 사회든지 강한 사람들의 배가 먼저 불러야 약한 사람들한테 먹을 것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군인도 가족이 있으면 가족하고 나눠 먹지 않겠냐고 한다.
 
 식량이란 것이 과거하고 달라서 군사력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천년만년 쌓아둘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먹는 것 가지고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8순 어른의 말씀이다.
 
 2월 27일부터 평양에서 나흘간 열린 제 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한에 쌀과 비료를 주기로 이면합의 했다는 내용을 두고 우리 언론들의 비판이 거세다. 국민들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북한퍼주기’식 지원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보장을 위한 제 5차 6자회담의 합의를 이행하고, 열차시험운행과 이산가족상봉을 재개하자는 오랜 만의 성과가 '퍼주기 논란'에 묻혀버릴  지경이다. '퍼주기 논란'을 재개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을 것이다. 
 
비료는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고 식량은 기본적인 생존수단이다. 식량의 지원여부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지 거래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받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하는 북한측의 태도가 괘심하긴 하지만(실제로 북한은 우리 측이 매년 지원하는 수십만 톤의 식량은 자신들이 1984년 남한 수해 때 보내준 쌀 5만석에 대한 답례라고 주장한다)
 
 그들도 도리를 아는 우리 동포인 이상 고마움을 정녕 모르긴 하겠는가? 조건부 지원이 통하는 합리적인 사이였다면 남북간의 대화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마음으로 우리가 성의를 보이다보면 그들도 감동을 받을 것이다. 자강도 희천에 임가공공장을 세운 정인화 할아버지의 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오기현 / SBS PD


  SBS에서 <조경철박사의 50년 만의 귀향> <조용필 - 평양에서 부르는 꿈의 아리랑> 등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주로 기획, 제작했다. 1998년 이후 북한을 20여 차례 방문했다. 현재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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