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현의 한반도 24] 이산가족찾기에 소극적인 북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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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율이 엄한 일사분란한 군사주의적 국가체제’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대게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북한에 가기 전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럴까?
 
 2004년 2월 말 평양에서 열린 [일본해의 부당성에 관한 남북토론회]에 참석했다가 남한의 역사학자들과 평양인근의 덕흥리고분을 참관했다. 덕흥리고분은 현재 중국 베이징인근인 유주지역의 지방장관이었던 ‘진’이라는 사람의 무덤이다. 고구려 사람이 유주자사였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풍속도 때문에 고구려 고분 가운데에서도 아주 귀중한 유적에 속한다.
 
 방북하기 전 우리는 무덤 안을 촬영할 수 있는 허가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조선아태)로 부터 부여 받았다. 4~5세기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인의 생활모습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누를 수 없었다.
  
 30여명의 남한 역사학자들이 살아있는 고구려의 역사를 대면하고 상기된 얼굴로 무덤을 빠져 나온 뒤 우리 취재팀의 차례가 되었다. 카메라 기자를 앞세우고 높이가 1m 남짓한 좁은 터널 입구로 들어가려고 하자 ‘무덤관리’라는 완장을 두른 관리인이 갑자기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상부로부터 촬영해도 좋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바가 없습네다.”
“아니, 우리는 조선아태로부터 허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네다.”
 
남이든 북이든 완장 찬 사람은 센 모양이다. 옆에 있던 조선아태 참사에게 항의했다.
 
“박참사,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촬영하기로 분명히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박참사가 무덤관리인에게 비키라고 얘기 했지만 카키색 잠바에 인민모를 쓴 50 중반의 사나이는 시선을 딴 데로 둔 채 여전히 꿈적하지 않았다.
 
“통보 받은 사실 없습네다.” 
 
체면 꾸겐 박참사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우리를 돌아다보며 내 뱉었다.
 
“오선생이 알아서 해결하시오.”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아태참사는 남한의 역사학자들을 안내해야 한다면서 황급히 강서대묘 쪽으로 사라졌다.
 
“아니 저 사람이, 우리보고 어떻게 해결하라고 그냥 가버려!”
 
양팔을 벌리고 무덤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묘지기 앞에서 우리는 난감해했다.
 
“그래 우리 한번 총화(‘회의’의 북한식 표현)해 봅시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덕흥리 무덤을 찍어서 남녘 동포들에게 보여주려고 서울에서 저 무거운 록상기(‘카메라’의 북한식 표현)를 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와서 막으면 어떡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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