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⑦ 플래툰과 아다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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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시간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갓 입사해 조연출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프로그램에 배치된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세월은 입사17년차를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추웠던 겨울이 가고, 서서히 따사로운 봄의 기운을 느끼는 2월의 오후, 책상 모퉁이에서 문득 나는 어떠한 속도로 달려 왔는가 하는 궁금증이 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과연 어떤 속도로 이 지점까지 밀려 왔을까? 사실 살아있는 모든 삼라만상은 속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변화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운동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움직임에 따른 속도를 크든 작든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을 되뇌이지 않더라도, 정지하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현상은 제각기의 속도로 묵묵히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의 맥박에서부터 사계절 변화에 따른 대자연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속도를 지나치게 앞서나가거나 못 미쳤을 경우, 생명체는 또 다른 변화를 머금게 되는 듯 하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같은 멜로디라도 연주되는 속도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음악의 또 다른 매력이다. 연주에 있어서 멜로디에 걸 맞는 적정한 속도와 음량이 완성도를 높여 나가듯이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은 인간 심연의 정서를 최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박자와 빠르기에 매달리곤 한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좋아하는 빠르기는 ADAGIO다! 구태여 말하자면 MODERATO(보통 빠르게)-ANDANTINO(조금 느리게)-ANDANTE(느리게)-ADAGIO(느리고 침착하게)-LARGO(느리고 폭넓게)의 연장선상에서 ANDANTE(느리게)와 LARGO(느리고 폭넓게)의 사이쯤 되는 빠르기이다. 이 ADAGIO의 제목을 갖고 있는 작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는 것이 바로 17세기 후반 바로크 작곡가인 알비노니의 ‘ADAGIO’와 20세기에 활동한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ADAGIO’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조금이라도 들어보신 분이라면 본인의 선택에 공감하시리라고 믿는다. 이 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도 엄숙하고 숙연하여 슬픈 기운마져 느껴진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의 노을 녁 속에 홀로 서있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듯, 말로는 차마 표현되지 않는 묘한 애수가 밀려온다.
 
그중에서도 사무엘 바버의  ADAGIO를 듣고 있노라면 필자는 18세기 잉글랜드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전함 테메레르 호-한때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선봉을 당당히 꺾어내며 명성을 날렸던 영국해군의 상징-가 황혼 녁 속에서 조용히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조국을 위해 무수히 겪어내었던 수많은 상처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예인선에 이끌려 해체를 위해 마지막 정박지로 향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둠속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감추듯 흐느끼는 사무엘 바버의 선율 속에서 필자는 치열한  삶속에서도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시대를 지탱해 내었던 존재들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슬픔과 아름다움은 통한다고 했던가?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러한 느낌은 여지없이 반복된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줄거리를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 장면은 전쟁의 참혹성과 거기에 스스로 빠져들어 파멸에 이르게 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단 몇 컷의 편집과 음악만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카타르시스...그 옛날 학교 교실에서 배웠던 이 단어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단 몇 분의 장면이 몇 시간의 연설이나 몇 백 페이지의 소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할 때, 그 묘한 여운은 필자를 알 수 없는 멜랑콜리에 빠져들게 한다. 사무엘 바버의 ADAGIO와 영화 플래툰, 그리고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호! 이번 한달이 다 가기 전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권하고 싶은 조합들이다.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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