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⑬ 모래시계와 파가니니
상태바
[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⑬ 모래시계와 파가니니
  • 오한샘 EBS PD
  • 승인 2007.10.05 1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주, 극장이나 연주장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듣던 음악이 특정 상황 하에서는 오히려 인간행동을 통제할 수도 있음을 알아봤다. 그저 단순한 감성의 도구로만 생각해왔던 음악이 오히려 그 감성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주체적 판단을 유보케 하는 심리적 요소로 기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필자는 무척이나 우울해졌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핵이나 생화학 무기 같은 대량 살상무기보다 오선지위에 새겨진 음의 조합들이  더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작금의 현실을 살펴볼 때, 이미 거실 깊숙이까지 들어와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각종 매체들의 존재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다양한 매체에서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따져보면 빛과 소리로 구성되어진 이미지의 단면들은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우리의 정서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대중의 선호도를 사전에 분석, 비판적 사고보다는 즉각적이고도 충동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현란한 시청각 이미지들의 출현은 이미 시작때부터  인간의 사유를 전제조건으로 했던 기존문화 시스템에 커다란 변혁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이미지의 무한한 잠재력에 주목했던 것이다. 잘 짜여진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전쟁에 따른 파괴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나섰던 천재적 선동가 괴벨스! 한 민족을 집단최면에 걸어 익명성이 행사할 수 있는 극한의 범죄들을 서슴없이 합리화시켰던 이 이미지 제작자의 행위는 순식간에 인류문명사를 뒤로 돌려놓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대중의 심리를 조작하고 유도하는 그의 대중 선동 전략들이 오늘날 현대 광고의 제작 기법에서 그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단지 그 목적이 특정의 이념, 게르만 민족에 의한 제3제국의 건설이라는 목표에서 이윤의 극대화라는 목표로 바뀐 것일 뿐, 새로운 형태의 권력자의 출현은 이제 뉴미디어와 결합하여 국경을 넘어 점차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고 있다.

여러분은 〈모래시계〉라는 TV 드라마를 기억하는가? 여명의 눈동자에 이어 대작 드라마 시대를 연 드라마 〈모래시계〉는 당시 귀가시계라고 불릴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몰고 왔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맛깔스런 스토리 구조와 탄탄한 연출력은 배우들의 선 굵은 연기와 맞물려 과거 드라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개성강한 캐릭터들을 탄생시켰다.

태수, 혜린, 우석으로 대표되는 모래시계의 인물 캐릭터들은 등장시마다 각각의 색깔에 맞는 고유의 빛(조명)과 소리(음악)을 동반하며 드라마에 감칠맛을 더한다. 아니 감칠맛을 더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바그너가 그의 오페라에서 사용했던 유도동기(Leitmotif)처럼 때로는 몇 마디 대사보다도 더 극중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각 캐릭터가 화면에 등장할 때 마다 반복적으로 교묘히 스며들기 시작하는 그들의 테마음악은 더 이상 과거의 배경음악이나 효과음악이 아닌, 대사에 버금가는 주요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때때로 화면위의 모든 요소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음악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유도 동기적 요소가 짙다.

그중에서도 여주인공 고현정이 분한 혜린의 테마곡으로 쓰인 파가니니의 작품은 인물의 캐릭터에 이른바 화룡첨정의 역할마저 해내고 있을 정도이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재료들이 완벽하게 배합된 음식을 앞에 둔 미식가의 설레임을 아는가? 이 작품에서 더 이상 파가니니적 요소는 없다. 이미 200년 전에 존재해왔던 작품이 갑자기 환호 받는 이유 - 그것은 혜린의 이미지가 결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그 시절 너도나도 CD가게에서 구입한 음악의 실체는 파가니니의 소리가 아닌 혜린의 이미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으면서 혜린의 애틋한 이미지를 떠올렸던 수많은 사람들! 그런데 문득 문득 괴벨스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