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⑭ 페임
상태바
[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⑭ 페임
  • 오한샘 EBS PD
  • 승인 2007.10.05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완연한 봄이다. 필자는 이런 활짝 개인 봄날의 바다를 더 좋아한다. 바다하면 작렬하는 태양아래의 여름바다니, 세찬 바람을 마주하며 소주 한잔 걸칠 수 있는 낭만의 겨울바다니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있을 런지는 모르나 필자는 봄이나 가을 무렵의 바다가 더 좋다. 다소 밋밋한 것 같지만 결코 쉽게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묘한 기운! 계절이 변해가는 4~5월과 9~10월의 바다에서는 그런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여기저기 소리치며 해변을 휘젓고 다니는 젊은이들의 경쾌한 함성과 버버리 코트를 움켜쥐게 하는 멜랑콜리한 차가운 바다 바람을 느낄 수는 없을지언정, 아직은 인적이 드문 텅 빈 바닷가를 적당한 날씨 속에서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사치는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더군다나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인근의 어부들 속에 끼어서 탁주한잔과 활어회 몇 점을 시식해본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더할 나위 없다’란 말의 또 다른 정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딱 어울리는 장소에서, 딱 어울리는 사람들과 싱싱한 먹을거리를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한잔 할 수 있을 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요, 아방궁이라는 어느 연극인의 말을 떠올리며 한낮의 텅 빈 봄 바다가, 방파제위에 앉아서 덥석덥석 대충 짚어먹는 회 몇 점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굳이 멋지게 꾸며진 일식집이나 고급 요리점보다도 두런두런 둘러앉아 소주잔 돌려가며 먹는 방파제위의 궁상이 더 끌리는 이유는 무얼까? 간단한 주머니칼과 방금 잡은 고기 몇 점 그리고 초고추장 하나면 모든 게 끝나는 해변가 임시 주막(?)이 호텔 주방장의 손맛보다도 더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것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함과 꾸밈없음 때문일 것이다. 시원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살포시 코를 자극하는 생선비린내, 그리고 간간히 뺨을 스치는 모래가루들, 이 모든 것들이 바닷바람과 어우러져 현장의 나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른바 종합선물 세트인 것이다.

그 싱싱함, 투박함, 단순함이 주는 거침없음을 필자는 잊지 못한다. 그런데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인거 같다. 문득문득 잘 만들어진 영화들을 접하다 보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대접받은 것 인양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이 존중받는 고객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은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다.

영화 〈페임〉(1980, 앨런 파커 감독)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화 속 가식 없는 솔직한 젊음이 주는 열정은 언제 봐도 보는 이들을 흥분케 한다. 장차 예술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의 아픔과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옛 학창시절의 추억과 뒤섞여 묘한 노스텔지어마저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은 한때 TV시리즈로도 선보인 적이 있지만 으뜸은 단연 앨런 파커 감독의 영화 페임(FAME)이다. 뉴욕의 거리 한복판에서 쏟아내는 터질 것 같은 열기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듯 싶다. 더 이상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장면이다. 때때로 언어로 옮기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소중함들이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그때의 울림이 느껴지는 소중한 감정-설레임!을 체험할 수 있다. 설레임!, 20대를 지나 어느 덧 중년의 나이로 들어갈수록 점점 엷어져갔던 감정이 아니던가! 사랑이라는 말보다 익숙함이라는 말에, 열정적이라는 표현보다는 반복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되어버린 지금의 필자에게 이 단어가 주는 가치는 슬픔마저 느끼게 한다. 한때 꿈을 쫒았지만,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소년이 자신의 첫 연애 편지를 발견 했을 때의 감정, 백발이 성성한 토토가 텅 빈 객석에 홀로앉아 어릴 적 보아왔던 영화의 파편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의 감정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을까? 아니 설명하지 않으련다. 문득 조지훈 님의 싯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중략)...나는 눈물을 흘리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이제 필자도 그 바다 앞에 다시 한 번 서 봐야겠다. 인간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이 휘몰아치는 바다, 다음부턴 무대 위에서 접할 수 있었던 그 직접적인 감정들, 설레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오한샘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