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⑱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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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⑱ 네트워크
  • 오한샘 EBS PD
  • 승인 2007.10.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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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방송관련 직종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터질 것 같은 사운드, 그리고 거기에 열광하는 수많은 시청자들을 당연시 여기며, 왠지 카리스마가 철철 넘칠 것만 같던 방송 연출자의 세계! 그 세계를 필자 역시 무던히도 동경했다.

1980년대 후반 대학시절을 보낸 필자로서는 꿈의 직업군이었던 언론 종사자, 그 중에서도 TV 프로듀서의 세계가 마냥 대단해 보이기만 했다. 오죽했으면 방송사 입사시험에 ‘고시’라는 이름을 붙여 ‘언론고시’라고까지 했을까? 프로듀서가 되면 인생의 모든 게 다 이루어질 것만 같은 꿈을 안고, 상식 책과 한자 책, 영자 신문을 돌돌 말아 끼고 다니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머쓱한 웃음만 몰려 올 뿐이다.

PD가 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 자신의 스타일을 구가하리라고 되새기며 어설픈 체육복 바지와 며칠씩 방치해두었던 외모를 애써 위안하려했던 필자의 꿈은 입사하자마자 곧바로 깨지기 시작했다. 아마 협회원 동료(?)분들 역시 비슷한 충격을 선배들로부터 경험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입사 첫 날 편집실에서 만난 선배 PD들의 모습은 필자가 대학시절, 도서관 한 켠에서 언론고시로 고분 분투했던 무렵의 다소 칙칙한(?) 스타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세운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원고를 뒤적이고 있는 선배가 있는가하면, 도무지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듯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로지 모니터만 뚫어져라 응시하며 애꿎은 편집기만 두둘기고 있는 선배들도 눈에 띄었다.

거기다가 아랫배들은 다들 왜 그렇게 튀어 나왔는지 TV드라마나 신문의 직업 탐방 면에서 보아오던 전문 직종의 면모는 도무지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었다. 아아...결국 이런 직업에 내 이름 석자를 끼워 넣기 위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20대 초반의 소중한 시절들을 신문 용지 속 상식들과 VOCABULARY 암기에 갖다 바쳤단 말인가!

말 못할 허전함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바로 그때 시선을 잡는 작은 액자 하나! 텅 빈 사무실 책상 한쪽 구석위에 놓여진 그 액자 속 글귀 -‘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 를 필자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 사람들은 어쩌면 말하는 방식이 다를지도 모른다. 프로그램으로만 말을 해야 했기에 때때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냉가슴을 앓아야 했던 선배들의 애환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음을 추스릴 여유도 없이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확인을 강요(?)당하는 전날의 시청률 보고서가 어릴 적 기말고사 성적표의 공포에 못지않다.

하루를 따듯한 커피한잔과 에누리 없는 시청률 숫자표로 시작해야하는 이 희한한 직업의 살가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이웃해 있는 동료는 물론이요 나 자신의 능력을 수시로 만천하에 공개하고 바로바로 확인해야만 하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얼마 전 접한 영화 한편은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흡사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가져다 줬다.

방송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들을 표현해낸 당대의 명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그 메시지가 주는 신랄함으로 인해, 시원치만은 않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욱이 30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한 장면 한 장면이 징그러울 정도로 오늘날의 방송현실을 풍자하는 듯해 놀랍기까지 하다.

1976년 대중들에게 선보인 후,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휩쓸며 기염을 토해낸 시드니 루멧 감독의 〈네트워크(1976)〉은 오늘날 방송 종사자가 꼭 봐야할 영화중 하나다.
이 영화 이전, 이후로도 많은 작품들이 방송을 소재로 만들어졌건만 필자는 아직까지 이 영화의 존재를 뛰어넘는 작품을 본적이 없다 “그런 저질 쇼를 방영하는 것은 방송국의 위신에 먹칠을 하는 것이네. 위신? 우리는 창녀나 마찬가지야, 이왕 파는 거 많이 팔아야지!”
영화 속에서 방송사 경영진이 하는 대사 중 일부다. 이 영화 결코 만만치가 않다. 감탄과 씁쓸함을 동시에 선사했던 작품‘네트워크’이번 달이 가기 전에 한번쯤 감상해 볼만한 영화다.   
      

오한샘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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