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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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 이응진 KBS PD
  • 승인 2007.12.2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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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일에 50년을 종사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을만한 일이다. 인터뷰의 달인 ‘래리킹’이 그런 일을 해냈다.

타국의 방송인이지만 그는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맘씨 좋은 이웃 할아버지 같은 외양 때문이기도 하고, 또 멜빵과 뿔테안경으로 단장한 깔끔한 외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친근감만으로 ‘토크쇼의 황제’라든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방송인’ 같은 최고의 형용어귀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직업인으로서 어떤 특별한 미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 74세 된 노인에게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얼마 전 그의 현재 일터인 CNN에서 그의 방송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었다. 졸업장도 어머니가 교장선생께 사정사정해서 겨우 받았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졸업 후 그가 처음 한 일은 택배회사 UPS의 트럭 조수 겸 배달부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이애미에서 방송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고 한다. 사회자가 50년 방송인생의 원동력을 묻자 “compelling!”이라고 말했다. compelling? ‘저항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번역해도 될까?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야구게임을 중계하는 아나운서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게 자기 프로그램이다 생각하며 라디오를 쳐다보면서 모든 게임을 흉내 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방송이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래리 킹은 50년 동안 4만여 명의 인물들과 인터뷰를 했다는데, 최고로 멋진 게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자 4가지 요소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1. 정열을 가진 사람.
2.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설명할 줄 아는 사람.
3. 약간은 호전적인 사람.
4.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

 
이 4가지 요소에 ‘자기를 망가뜨리는 기질이 있는 사람’이면 더 금상첨화며, 그런 대표적인 인물은 ‘프랭크 시나트라’였다고 했다. 많은 시청자들이 말하는 래리 킹 인터뷰 방송의 특징은, 격의 없고, 편안하고, 편견을 갖지 않는 태도라고 한다. 그의 50년 특별프로에 방송인이라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있다.

래리 킹은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이 친구를 보내버리겠어’라든가, ‘이 친구를 띄워 줘야지’하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하는 적은 없습니다. 항상 배우려는 태도로 임하고, 질문을 짧게 하려 노력하고, 답변에서는 빠지고 , ‘나’라는 단어 사용은 피합니다.”

그의 방송관을 알고 난 후부터 그의 프로를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얼마 전엔 한 성형 외과의사가 생방송 중 인터뷰를 거절하고  퇴장하는 사고가 있었다. 흑인 래퍼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의 엄마를 수술한 이 의사는  다음날 그녀가 사망하는 바람에 화제가 됐다. 그는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환자가족의 요청으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며 나가버렸다. 래리 킹 라이브 사상 처음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한다.

의사가 인터뷰를 거절하고 스튜디오를 나갈 때 래리 킹의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평상시 인터뷰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 ‘이 친구를 보내버리겠어’라든지, ‘이 친구를 띄워줘야지’ 하는 의도나 편견을 가졌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비난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악수까지 하면서 순순히 보내주었다.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야 인터뷰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방송인이 있다. 잘못된 특권의식과 직업의식으로 목에 힘을 준 고압적 자세로 인터뷰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방송인들의 책상 좌우에 레리 킹의  이 말을  크게 써 부쳐 줄 만하다.

“절대로 ‘이 친구를 보내버리겠어’라든가, ‘이 친구를 띄워줘야지’하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언론천국이 도래했다. 언로가 뚫릴 대로 뚫려서 사통오달을 넘어, 위로는 고가도로, 밑으로는 지하철이 달리는 느낌이다. 오늘도 수백의 ‘펜’들과 수십 대의 ‘카메라’들이 치열하게 취재 경쟁을 벌여 국민의 제단 위에 신성한 ‘진실’과 ‘사실’을 한껏 바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어떤 신문도 ‘진실’을 쫓는 자로 대접 받지 못하고, 어떤 방송도 ‘공정’하다는 찬사를 받지 못한다. 불편부당의 기치를 하늘 높이 펄럭이며 목소리를 높이건만 어느 누구도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언론인”이란 칭호를 받지 못한다.

목소리도 크지 않고, 상대를 궁지로 몰지도 않는 래리 킹 할아버지.

나 또한 이 74세 된 노인에게서 오히려 아름다운 방송인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래리킹에겐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응진 / KBS 드라마팀 PD , 문화칼럼니스트


 대표작으로 1994년 최수종과 배용준. 그리고 이승연,최지우가 출연한드라마 <첫사랑>과 <딸부자집> 등이 있으며  2004년 KBS 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HDTV 문학관' 을 제작 중이다.  '타블라 라싸'는  흰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순백의 상태를 말하듯 철학자 루소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 말을 사용했다. 흰백지 위에 생각을 쓰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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