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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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 이응진 KBS PD
  • 승인 2008.01.2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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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TV드라마에는 ‘일본형사’ 를 만드는 전형적 ‘레시피’가 있다.

 요리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재료로 소위 ‘도리구찌’라 불리는 모자 하나만 있으면 된다.
만약 지금 ‘도리구찌’가 있다면, 당장 그걸 쓰고 거울 앞으로 달려가 약간 인상을 써 보시라, 그럴듯한 일본 형사 한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좀 성에 덜 차면 모자를 쬐끔 삐딱하게 쓰고 코 밑에 수염을 슬쩍 부쳐 보시라, ‘악랄한 왜놈 형사’ 한 놈이 무고한 조선 백성을 심문하려 노려볼 것이다.

‘도리구찌’ 레시피는 ‘백바지+백구두’로 한량을 만들어내는 레시피와 더불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드라마 캐릭터 빌딩법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우리 민족의 아픈 현대사 속에서 파생된 한 많은 실루엣들이다.

 재작년 ‘도리구찌’를 하나 샀다.

 왜 하필 못된 왜놈형사를 연상시키는 모자를 샀을까? 돌이켜보니 49세 노처녀로 요절한 친구 때문이었다. 유명 드라마작가였던 친구는 그 무렵 간암으로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황당한 운명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대들어보지도 못하고 자괴감에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종의 도피였다.

 오사카 거리를 헤매던 중 눈에 들어온 ‘도리구찌’.

 모자를 발견한 순간 나는 불현듯 악랄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악랄한 왜놈 형사가 되어 인간의 생명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는 그 악랄한 누군가를 체포하고 싶었던 것일까?

코 밑엔 항상 수염이 무성하므로 모자를 쓰는 순간 변신은 완성되었다. 나는 악랄한 왜놈 형사가 되어 오사카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은 서울로 돌아왔다.

친구는 간암 판명 30일 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 내 곁을 떠나버렸다.

 그가 저 세상으로 가버린 후에도 나는 그 모자를 쓰고 촬영도 하고, 여행도 하고, 골프도 쳤다. 늘 야구모자 차림이었지만 친구가 떠난 후론 도리구찌를 더 애용했고 집착까지 생겼다. 그러다보니 검정색이던 모자가 햇볕에 거슬리고 거슬려 흉하게 탈색되어 갔다.

 어느 날 문득 모자 하나를 더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일본에 친구가 있어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똑같은 스타일의 도리구찌를 두 개나 사 보냈다. 우정과 새 모자에 두 배로 흥분한 나는 즉시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근데 왠지 어색했다. 알고 보니 내가 가진 건 여름용 디자인인데 겨울용이었다.

 나는 직접 구해 보기로 맘을 먹고 용감하게 본사로 국제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여름디자인은 절판되었다며 혹시 남은 게 있는지 전국의 매장을 모두 점검해 보겠다고 했다. 마침 주말인지라 월요일날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엉터리 일본어에도 끝까지 친절했던 그녀의 이름은 ‘금자씨’가 아니라 ‘이세끼’상이었다.

맘이 급해진 나는 또 다른 수단도 동원하기로 했다.

 한류 때문에 알게 된 일본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이세끼’상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도움을 청했다. 월요일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름용 디자인은 전국의 매장 어디에도 없고 새 출시계획도 안 잡혀있다며 본인이 더 안타까워했다.

 “왜 바보같이 2개를 안 샀지?”

 그렇게 애착과 후회가 교차하던 며칠 후, 일본의 모자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세끼’상이 아니라 어떤 남자였다. 아! 이제야 모자 하나를 발견했구나 싶어 너무 기뻤다. 그런데 남자의 말은 저번 ‘이세끼’상과 똑같았다.

 “여름용 디자인은 품절이며, 대단히 미안하지만 다음 출시계획은 아직 안 잡혔으며, 잡히면 그 제품을 살 수 있는 매장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상냥한 목소리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를 되풀이하며 자신은 그 제품을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했다.  

“디자이너?”

“네. 죄송합니다. 저는 그 모자의 디자이너 타마리(TAMARI)입니다.”

“?????”

 순간 번개와 함께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붙잡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정신을 차린 뒤 ‘도리구찌’를 꾹 눌러쓰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엔 더 이상 악랄한 ‘왜놈 형사’는 없었다. 번개를 맞은 듯한 내 모습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환한 미소를 띤 ‘이세키’상과 ‘타마리’상의 얼굴과 함께 스쳐 지나갔던 그 생각이 나를 향해 부메랑처럼 날카롭게 되날아왔다.

 “도리구찌를 쓰고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자들! 친절로 세계를 정복하려는구나!”

 

이응진 / KBS 드라마팀 PD , 문화칼럼니스트


 대표작으로 1994년 최수종과 배용준. 그리고 이승연,최지우가 출연한드라마 <첫사랑>과 <딸부자집> 등이 있으며  2004년 KBS 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HDTV 문학관' 을 제작 중이다.  '타블라 라싸'는  흰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순백의 상태를 말하듯 철학자 루소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 말을 사용했다. 흰백지 위에 생각을 쓰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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