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치안 지킴이? 사형제 선동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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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치안 지킴이? 사형제 선동을 멈춰라
사형제를 선동하는 김문수 지사, 고정원 씨와 ‘데드맨워킹’을 보라
  • 오마이뉴스 박형준 기자
  • 승인 2008.03.2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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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를 다룬 우리 영화 중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있다. 소설가 공지영의 원작을 송해성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감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원래부터 '꼬인 사람'인 것일까?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형수가 '용서'받으려면 잘 생긴 외모를 가져야 하며, 적당히 '까칠'하다가 예쁜 수녀의 조카를 만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그 '까칠'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쏟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끔찍한 범죄의 동기는 '사랑'이어야만 한다."

범죄의 변명으로 '사랑'을 언급하려면, 적어도 소설가 하병무 원작의 <남자의 향기>쯤 되는 처절함에 순도 100% 순애보는 갖춰져야 그나마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한 것일까.

<남자의 향기>는 그 남자가 왜 사형수가 됐고, 그러기까지 한 여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신앙과도 같은 사랑을 바쳤으며, 죽음이 확정된 이후에도 어떻게 여자를 돕는지, 그 '과정'을 그려간 작품이다. '사형제'를 말하지 않았고 애초부터 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던 작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운을 남긴다.

하기는, 그 <남자의 향기>의 '혁수'도 잘 생긴 김승우(영화)와 안재모(드라마)가 맡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눈의 간사함'으로부터 평생을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다.

이쯤 되면, 한국영화와 한국드라마의 공식을 탓해야 하는 일일까? 주연배우의 '외모'에 의해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영이 '죽음의 색깔'이라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짙은 화장과 함께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담배 연기를 연출하면서, 강동원과 묘한 눈빛을 주고 받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포스터를 기억해보라. '피식' 안웃을 수 있나.

'비호감 사형수'의 죽음을 향한 여정, <데드맨 워킹>

숀 펜이 멋있고 인상적이라는 이야기는 할 수 있어도, 잘 생겼다는 이야기는 하기 어려운 것 같다. 팀 로빈스 연출의 1995년작 <데드맨 워킹>에서, 숀 펜은 사형수 '메튜 폰스렛'으로 등장한다. 한 커플을 덮쳐 여성을 강간한 뒤에 남녀 모두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한 가정의 소중한 자녀들을 살해함으로써 그 가족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했다. 피해자의 가족은 그가 죽기를 바란다. 그래서, 피해자의 가족은 '메튜 폰스렛'을 돕는 수녀 '헬렌 프레진'조차도 "인간같지도 않는 그를 돕는다"는 이유로 배신감을 느끼며, 성토한다.

'메튜 폰스렛'은 거기에 한술 더 떠 히틀러를 추종하는 네오나치인 데다가, 인종차별주의자 기질까지 선보이며 궤변을 남발한다. 그러니, 순수한 마음으로 돕고자 했을 뿐이었던 '헬렌 프레진(수잔 서랜든)'조차도 곤란한 입장에 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데드맨 워킹>을 지켜본 관객이라면 잘 안다. 이게 바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형수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이다. 팀 로빈스는 사형수의 본질에, 그를 바라보는 피해자 가족의 시선까지 통찰해 묵직하게 영화에 반영했다. '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몸소 입증하고 있다. 주제가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렇듯, 도대체 개과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임에도 '헬렌 프레진'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형집행일까지 남은 시간은 6일, 그 6일을 함께 하며 '메튜 폰스렛'을 살펴보며 그를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은,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인간이었던 '메튜 폰스렛'도 결국 죄와 남겨진 가족에 대해 걱정하는 하나의 인간이었다는 점. 그래서일까? 감독 팀 로빈스는 연출의 변으로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남긴다.

"사형제도의 가장 큰 단점은, 사형수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있는 순간에 그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

'가해자의 인권'만 찾고 '피해자의 인권'은 무시한다?

뭐든, 간결하면 명쾌해보인다. 사형제유지론의 목소리가 솔깃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들을 어떻게 살려놓을 수 있으며, 어떻게 국민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그들의 입에 밥을 넘겨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을 살려두면 억울하게 살해당한 피해자와 그 가족의 한은 어떻게 갚겠느냐는 것이다.

<데드맨 워킹>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피해자의 가족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철저한 사형폐지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조카가 무참히 살해된 다음에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나라도 그럴 것이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야 그럴 수 있다. 그런 원수와 어떻게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있겠는가. 그놈의 법만 아니었으면 내 손으로 직접 심판하고 싶은 생각, 왜 안들겠는가? 그리고, 그런 놈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래도 법과 정의는 살아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법을 통해 원한을 갚고 복수를 하자는 것이지만, "죽었기에 죽여야 하는 복수"가 유가족에게 궁극적으로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가 다시 살아올 수 있을까? 아니다. <데드맨 워킹>에도 마침 눈 여겨볼만한 장면이 나왔다.

'메튜 폰스렛'의 사형 장면을 직접 지켜보고 그의 장례식에도 찾아온 피해자의 부모는 '헬렌 프레진' 수녀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형돼 죽은 살인범의 장례식에) 내가 왜 왔는지를 모르겠어요. 아직도 미움이 많은데…. (미움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내 신앙심은 당신보다 부족한가 봅니다."

결국 그는 "미움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고는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 찾아왔다는 것 자체에서 '죽음에 따른 죽음'으로부터 미묘한 감정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사이코패스 살인마라고 할 수 있는 유영철로부터 노모와 아내, 그리고 외아들까지 잃은 고정원씨가 유영철을 양자로 삼고자 하면서 '용서'를 이야기했던 이유도, 결국 그 '미묘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고정원씨도 사람인 이상, 일가족을 모두 죽인 당사자를 향해 쉽게 '용서'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터넷 뉴스나 신문으로 살인사건을 접하고 그 용의자를 욕하며 댓글로 "죽여버리라"고 성토하고 있는 우리들과 비할 바가 못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서'를 이야기했다. 고정원씨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고민에 고민, 슬픔에 슬픔을 거듭한 끝에 뭔가 간절한 결론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한마디는 인터넷에서 온갖 욕설을 달면서 "죽여버려라"를 외치고 있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다.

"사형수를 죽인다고 해서 맺힌 한이 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범죄율이 줄어드는 것 또한 아니고요. 따라서 사형제는 즉시 폐지해야 합니다. 제가 유영철을 용서하고 양아들 삼기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가슴이 저려왔던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직접 행동에 옮기기까지 이겨내야 했던 고정원씨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 끝없는 인내에 숙연해진 것일까. 어쨌든, 그의 한마디와 말뿐이 아닌 실천은 내게 먹먹한 감동을 전해왔다.

'피해자의 인권'은, 가해자를 능지처참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인권'은 억울하게 죽어간 그 꽃다운 목숨이 하늘에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혹시라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보다 안전한 세상'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의 실천을 위해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 정치인과 경찰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길 바라는 것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사형제'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관내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국민을 향해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사죄하는 것이다. 치안이 부실했고 만약을 위한 '시스템'에 소홀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절대 그런 끔찍한 범죄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말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사형제' 유지하면 치안이 좋아진다?

'사형제'의 낙원은 조선왕조였다. 가볍게는 사약에서부터 능지처참에 거열형 등, 온갖 사형의 기법이 이렇게나 다양했다.

하지만, 누구도 조선왕조가 '완벽한 치안'을 구축했노라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여러분들이 재밌다고 지켜본 드라마 시리즈 <별순검>을 보라. 그런 사회에서도 살인사건은 늘 일어났으며,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만행을 저지르는 이들도 많았다.

진중권씨의 23일자 <프레시안> 기고문 <"한국에 필요한 것은 뇌 수술">에도 거론됐듯이, '공개처형'도 마다하지 않는 중국은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인권을 존중해주는 국가"여야 하며,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치안'을 구축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 '사형제'는 '살인사건 방지'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더 인상적인 사실을 거론해보자면,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예를 들을 수 있다. "연쇄살인은 자본주의의 퇴폐적 산물"이기에 "우리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던 북한 및 공산권의 당당한 반응을 무색하게 만드는 살인마다. 그는 13년간 56명의 여성과 소년을 살해했고, 57번째 피해자를 죽이려던 찰나에 체포됐다.

그가 체포됐다고 연쇄살인은 멈췄을까? 아니다. '소련 붕괴' 이후이기는 해도,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체포된 다음에도 '야만인'이니 '타칸로그의 야수'니 하는 살인마들이 출현해 도시를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살인사건의 방지'는 철저한 치안시스템 구축, 그리고 보다 확실한 초동수사 시스템 구축이다. 한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정신과 상담'을 꺼리는 한국인 특유의 기묘한 자존감 지키기도 그 이유라 할 수 있겠다. 고정원씨도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사형제 자체가 범죄를 예방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범죄발생요인 자체를 본인에게 한정시킴으로써 사회의 책임을 회피한다."

서양에서의 사례를 비롯해 태반의 연쇄살인범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학대나 성폭력, 지나친 종교적 구속에 시달린 이들이 많았다. 아이를 부모의 물건이나 꼭두각시 정도로 취급하는 한국의 부모들, 살인범 성토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모를 위험의 불씨를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긴급출동 SOS>에 등장하는 '아동 학대 부모'들, 그게 반드시 특별한 정신이상자들만의 만행일까? 아니다. 반드시 그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공부든 뭐든, 특유의 '윽박지르는 문화' 자체가 한창 풍부한 표현력과 솔직한 감성을 품어야 할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된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은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감정의 표현, 내지는 성적 표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몰라 만행이 범죄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만행을 저지르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을 남발하며 잘못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고 풍부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사회다. 돈이든 뭐든, 특정한 매개체를 이유로 인간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구조가 '자본주의'라는 사실도 깨닫길 바란다.

그런 고민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죽여라"만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당신들의 그 "죽여라"라는 선동에, 정말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사형제' 운운하면서 물타기를 한다. '사형수를 죽이고 살리고'의 문제를 떠나,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부터 고민해보길 바란다.

'용서'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정원씨의 고통 끝에 어렵게 내린 '용서'라는 결론을 모든 피해자 가족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을 강요하는 것도 엄연한 '폭력'이다. 그 억울함과 한, 누군들 모를까. 피해자 가족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 위한 모두의 고민이라면, 어설픈 선동에 멈춰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형제'의 유혹 뒤에 숨겨진 허상은 저렇듯 낱낱이 드러난다. 원하는 것이, 그저 복수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진정한 치안과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사건을 서둘러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인지, 그것부터 판단해보라.

원하는 것이 후자라면, '죽이고 살리고'를 떠나 최소한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시늉'이라도 내보기 위한 첫 단계는 아무래도 고정원씨의 고뇌를 거듭한 한마디일 것이다. 많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어요. 막상 범인이 잡히고 난 뒤 저도 알 수 없는 마음의 변화가 일었습니다. 그도 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족의 죽음을 똑같은 죽음으로 되갚는 게 과연 온당한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용서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유영철에게도 제 딸들의 자식과 비슷한 또래가 있다는 얘길 듣고 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싶기도 했구요. 하느님의 뜻인지 모르나 저도 모르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한 인간으로서뿐 아니라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로서도 미움을 버리고 용서의 길을 택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어요."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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