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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중에 한의사가 한 명 있다. 나보다 두 살 위이니 대략 비슷한 세대다. 부인도 같은 대학을 졸업한 한의사다. 부부 한의사이니 당연히 벌이가 괜찮을 것이다. 집은 신도시에 있다. 이 정도면 대략의 선입관이 잡히는 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볼 때마다 그런 선입관을 바꿔 놓았다. 일단 지극히 환경 친화적으로 산다. 먹을거리부터 소비생활이 엄격했는데, 이건 뭐 한의사니까. 그 다음, 아이들 사교육을 하나도 안 시킨다. 그리고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한다. 알고 보니 집이 전세다. 그 전세금 빼면 남한강 근처에 집 사서 살 거라고 한다. 폐교될 뻔한 초등학교 하나를 주민들이 되살려 놨는데 아이들을 거기 보낼 거란다. 결정적인 건 이것이었다. 진료 시간을 일주일에 2번으로 줄여 버렸다. 일하는 시간 줄여서 아이들하고 시간 더 보내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할 거라고 한다.

선거철이라 그런지 요즘 ‘진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진보는 지금 붕괴되고 있다. 정치세력으로서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대운하가 공약이니 아니니, 박 모 씨가 네 편이니 내 편이니, 아무리 심드렁하게 봐도 선거판은 유례없이 저질인데, 진보는 여전히 무기력하다. 심지어 요즘 같아서는 ‘차떼기’가 재현되어도 똑같을 거라고들 하지 않나.

원인이 무엇이고 대안은 무엇이고, 이런 고담준론은 솔직히 지겹다. 다만 이런 생각은 요즘 자주 한다. 어떤 생활이 진보적인 생활인가, 어떤 태도가 진보적인 태도인가, 그리고 이런 자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 요즘 들어 많이 변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투표장에 가서는 진보정당을 찍고 컴퓨터 앞에서는 주식투자를 위해 뉴스를 검색하는 사람보다는, 저 일하기 싫어하는 한의사가 훨씬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치적 취향은 모른다. 어쩌면 2번을 찍고 다닐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투표장에 안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진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돈과 물질을 추구하는 삶은 경쟁과 속도를 지향할 수밖에 없고, 가치와 여유를 추구하는 삶은 공동체와 나눔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운하 뉴스를 자기 투자정보로 활용하는 태도나, 법질서를 지키면 GDP가 5% 상승한다는 의식구조나, 사실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주장을 나름대로 펴 보는 이유는, 이 지면이 PD들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을 민감하게 맞춰야 하는 게 방송이지만 또한 그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방송이다. 방송의 소재나 주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점점 짧아지는 코미디 코너, 아침 일찍 편성된 드라마, 오락과 정보를 결합한 포맷, 이런 거 하나 하나가 사실은 사회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저 콘티와 원고에 충실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의식을 재구성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길게 생각하고 토론하면서 우리의 목표와 방법론에 대해 되돌아 볼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프로그램에서 인간을 내세우면서 방법론은 비인간적인 게 아닌지, 세상이 한 걸음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거꾸로 돌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쩌면 PD들은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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