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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가 있다 했다. 남한사회를 전복하도록 지령 받고 소요를 주동한 배후가 있다 했다. 때마침 1면에 장식되는 얼굴들, 간첩이라 했다. 불순분자를 잡아내었으니 국민은 안심하라 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 국가라는 이름을 단 한 위원회는 이들이 실은 간첩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고문과 조작이 있었다 했다.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했다. 연일 자살하는 이들의 배후에 죽음을 선동하는 배후가 있다 했다. 그래서 자살을 부추기고 그 유서를 대필했다 했다. 자살방조죄,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 했다. 체제 전복을 위해 목숨을 이용하는 반인륜적 배후라 했다. 그리고 16년 후… 국가라는 이름을 단 그 위원회는 그 유서의 필적이 실은 다르다고 발표했다. 자살을 부추긴 배후가 아니라 했다.

그 동안, 간첩을 만든 기관도, 간첩과 배후라며 기소한 곳도, 판결한 곳도, 그 어디도 진실을 찾아주지 않았다. 그 어떤 책임자도 처벌받지 않았다. 진실을 조작하고 배후를 만들어 낸 이들은 책임과 처벌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반면 진실을 밝혀 주자 만든 여러 위원회들은 ‘세금 먹는 하마’라는 낙인과 뭉뚱그려져 통폐합 되고, 2년이 더 지나면 그 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배제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라는 긴 이름의 법안이 있었다. 불행히도 발의된 지 2년이 넘도록 심의조차 없다가 지난 국회의 임기와 함께 묻혀 버렸다. 국가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자가 헌법과 법률에 반하여 국민의 인권을 중대하게 침해하거나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하면 ‘반인권적 국가범죄’다. 직무유기, 직권남용, 불법체포·감금, 폭행·가혹 행위, 증거인멸, 심하면 살인까지 해당한다.

하지만, 살인을 제외하면 현행 형법상 공소시효는 대부분 7년 이하다. 행여 운 좋게 정권을 한 번 더 잡아채버리면 공소시효 7년은 훌쩍 넘길 수 있다. 장세동이 그랬다. 수지김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기만으로 정권의 안위를 획책했던 그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그냥 걸어서 검찰청을 나왔다. 국가 권력기관에 종사하면서 중대한 반인권적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는 걸어 나왔다. 그 법안은 그 직후 발의되었다가 며칠 전 공식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2008년 5월, 촛불시위의 배후를 찾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찾으려다 못 찾고 있다. 8,90년대였다면 만들어서라도 튀어나오던 그 배후는 그들 눈에도 이제 종잡을 수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국가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이들의 국민 인권에 대한 무거운 책임의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민의 생명권, 국민의 주권, 국민의 인권은 다시 중대하게 침해받고 있지 않는가? 조직적으로 은폐·조작될 우려는 없는가? 이를테면, “병이 발생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병의 잠복기가 그 책임을 물을 시효를 훌쩍 넘기는데, 그때면 국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최소한의 법적 책임조차 빠져 나갈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 김기슭 SBS 편성기획팀 PD

[야만(野蠻):②교양이 없고 무례함. 또는 그런 사람] 자, 무한 소통의 시대에, 귀를 닫고 거리로 내몰면서 그저 강압과 폭력의 경도가 조금 물러졌다 해서 야만 시대를 벗어났다 함이 옳은가? 다시 이성과 대화와 진실이 내팽개쳐진 야만의 시대로 되돌리려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저 자신의 고난과 역경과 성공의 과거만을 기억하고, 불편한 과거는 그저 빨리 흘려보내야 할 시간으로 여기는 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자격이 있을까? 이 모든 사태의 배후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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