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상식에 도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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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상식에 도발해서는 안 된다"
[기고] 강명욱 KBS PD
  • 강명욱 KBS PD
  • 승인 2008.06.16 18: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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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욱 KBS PD
시민들은 박승규 노조위원장이 정연주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선전물을 치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선전물을 묶어버리거나 쓰러뜨렸다.  ⓒ이정환 KBS PD
정연주 KBS 사장 사퇴 서명운동을 벌인 KBS노조.

▲ 강명욱 KBS PD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 깃발을 들어 올린 영국의 대처 수상은 “사회란 없는 것이며, 개인과 그들의 가족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 대로라면 ‘공공’이나 ‘공동체’ 혹은 ‘사회적’이란 말은 존재할 수 없고 국가의 역할은 그저 개인들 간의 경쟁을 감시하고 그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공권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상식에 대한 도발이고 신자유주의가 도처에도 공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대처는 운이 좋게도 집권 직전에 발생한 IMF위기(우리나라는 보수 정권 말기에 IMF가 터졌지만 영국은 노동당 정권 말기에 IMF가 터졌다)에 따른 불만과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로 얻은 지지율, 또 당시만 해도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알 지 못했던 국민들의 무지를 바탕으로 도발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신자유주의의 기수답게 국민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에 도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10년 전에 IMF를 겪었고,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선행 학습한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 육골분 사료를 먹은 30개월 이상 소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이고, 상수도, 의료 민영화가 서민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도 상식이고, 특목고 확대가 사교육비를 늘릴 것이라는 것도 상식에 속하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자기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국민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이상 언론(방송)장악 기도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야말로 국민들의 상식을 바꾸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론의 목소리가 바뀌면 세상의 상식도 바뀐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타당한 얘기다.

그러나 다행히도 국민들은, 심지어 초중고 학생들까지도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을 통해 언론이 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 편이 되서 국민들의 상식을 바꾸려고 하던 조중동이 연일 분노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진부한 얘기에 속하고, 나아가 국민들은 두 시간에 걸친 긴 야간 행군도 마다하지 않고 광화문에서 여의도로, 공영방송 지키기에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박승규 집행부도 자신들의 목표만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면서 국민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 도발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정적인 위기가 닥치지 않는 한 박승규 집행부가 상식의 목소리에 따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11일에 벌어진 이른바 성명서(권력의 나팔수 감사원은 물러가라)논란이다. 이 논란이 의미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박승규 집행부가 언론노조와의 신뢰를 무참하게 짓밟았다는 거고, 둘째는 사실이 아닌 내용을 버젓이 코비스와 노보특보에 실어 KBS 조합원들을 속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명서의 내용이‘특별감사 규탄’이라기보다는 오히려‘특별감사 환영’으로 변질됐다는 점인데, 이와 관련된 박승규 위원장의 발언이 또한 놀랍다. 성명서의 내용이 논란이 되자 박승규 위원장은 “감사원으로부터 표적감사를 받는 게 정연주 사장 때문인데 우리가 정연주 사장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감사 반대운동을 할 수 있느냐”며 오히려 반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KBS 전체를 크게 흔들게 될 것이 분명한 표적 감사조차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명색이 위원장이라는 자가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그‘당당함’이 놀랍다 못해 두렵다.

▲ 정연주 KBS 사장 사퇴 서명운동을 벌인 KBS노조.
노동조합은 이 모든 것이 다 정 사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민들에게도 정 사장 퇴진의 정당성을 알려나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 혼란의 중심에는 박승규 집행부가 있다. 현명한 자는 아주 큰 일도 소리소문 없이 잘 해결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작은 일조차도 온갖 요란을 떨면서 결국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이켜서 한번 생각해 보자. 사내·외에서 처음으로 ‘반 정연주’를 외치고 나선 자들이 누구인지를. 정 사장 문제가 원래 이렇게 크고 시끄러운 것이었는가? 크지 않은 문제를 집요한 언론플레이를 통해서 이렇게 키워온 것은 아닌가? 정말 이 문제가 4년 동안 노동조합 2대 집행부에 걸쳐서 모든 역량을 다 쏟아부어야 할 문제였던가? 수많은 만장 속의 저 저급한 구호들은 정말 KBS인들의 목소리인가? 당신들의 주장대로 구성원의 80%가 반대하고 3천 2백여 명이 퇴진에 서명했다면 왜 더 적극적으로 정 사장 퇴진에 나서지 못하는가!

이미 많이 늦었다. 하지만 “정사장이 죽어야 KBS가 산다”는 그 주장이 추호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구성원의 80%가 찬성할 거라고 판단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조합원들의 총의를 물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가라. 다만 총의를 묻는 과정에서 집행부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집행부는 전원 사퇴한다는 조건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제발이지 문제를 매듭지을 능력이 없다면 더는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마라.

어제(15일) 광우병대책국민회의가 ‘5대 핵심 과제’를 선정하면서 공영방송의 문제를 포함시켰고, 오늘은 언론학자 124명이 “공영방송 장악 음모 철회”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다. 이제 국민들은 더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주시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촛불집회까지 특정 협회와 연계해 배후론을 주장하는 등 조합 집행부 의 발언은 위험 수위를 넘어섰고, 여기저기서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나타나 일정한 타겟을 정조준하면서 내부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 사장의 후임으로 누가 오더라도 KBS는 구성원간의 심각한 내홍으로 낙하산 반대 투쟁은 엄두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위기에 처한 정권이 그나마 부담을 덜기 위해서 KBS 출신을 임명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에서 내홍은 예상보다 격렬하고 오래 갈 수도 있다.

한 때 떠들썩했던 이른바 ‘강동순 유승민 윤명식 대화 녹취록’에 보면 강동순 당시 방송위원이 정연주 사장을 가리켜 “연임돼봐야 아무 힘도 못 쓰는 껍데기”라고 폄하하는 대목이 있다. 그 ‘껍데기’를 정권을 잡고 반년이 되도록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 약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 인물들을 사퇴시켜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표적감사에다가 턱없는 혐의까지 씌워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까지 하겠다고 날뛰고 있다.

정 사장 퇴진에 목을 매는 자들은 혹시 뭐라도 나올까 기대를 걸겠지만, 정 사장만 몰아낸다면 무슨 방법이든지 용납하겠다는 이런 태도는 국민들의 분노만 더 키울 것이다. (녹취록에는 이들이 KBS 노동조합 제11대 정부위원장 선거에서 박승규, 손관수 두 후보 중 어느 쪽을 지지했고, 어떤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도왔는지 그리고 ‘공정방송노조’라고 하는 물건은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정 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어지러운 국면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여의도 촛불집회에서 국민들은 박승규 집행부를 “어용노조”로 지칭했다. 이는 어용노조가 ‘나쁜 노조’의 대명사가 된 데 따른 표현일 뿐 국민들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생각이 그렇고, 많은 조합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사원을 대표하는 유일한 법적 기구인 노동조합을 대신하는 구심점을 생각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마지막까지 노동조합을 설득하고, 연대투쟁의 장으로 이끌려는 호소의 목소리가 안팎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박승규 집행부는 “정 사장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감사를 반대할 수 없다”는 발언까지 했고, 촛불집회를 놓고도 사실상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노동조합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은 그저 희망일 뿐 이제 그 생각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당장 대안이 없어 보이더라도 버릴 것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가질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시민들은 박승규 노조위원장이 정연주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선전물을 치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선전물을 묶어버리거나 쓰러뜨렸다. ⓒ이정환 KBS PD
지난 12일 밤,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향하던 긴 촛불의 행렬이, 이미 쉰을 넘겨 메마른 가슴에도 마치 순례의 행렬처럼 거룩하게 느껴졌다. KBS인들의 마음속에 국민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들의 마음속에 KBS는 두 시간의 먼 거리를 걸어도 좋을 만큼 소중한 존재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국민으로부터의 관심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고, 국민에 대한 의무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 공영방송의 숙명이라면 우리의 기준은 국민들의 상식에 맞아야 한다. “정연주를 보호하는 것이 언론 독립을 지키는 것이냐”고 내부의 생각으로 반문할 것이 아니라,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 사장을 권력의 입맛대로 바꾸는 것은 언론 독립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국민의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속된 말로 ‘개똥도 약이 된다’는데, 설사 불구대천의 원수라 하더라도 지금은 정 사장이 버텨 주는 게 공영방송 KBS를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국민들이 꾸짖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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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2008-07-18 17:36:44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난후의 느낌은 서글프다는 느낌 때문에 찝찝하고 분노가 일어 납니다.
술자리 사석에서 더러운 작당으로 구성원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한 반대 노조를 결성하고 더러운 술주정을 늘어 놓는 녹취록이 공개되어도,
해당 당사자들은 오히려 떳떳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세상이 기분 더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준엄한 글을 읽고 나니 분노가 희망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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