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아이러니하게도 분열이라 불렀다. 행진곡에 맞추어 똑 같은 옷을 입고, 똑 같이 팔을 흔들고, 똑 같은 보폭으로 걸으며 반장(소대장)의 힘찬 구령 소리에 고개를 힘주어 돌렸다. “우로~봣, 충성!” 그걸 왜 ‘분열’이라 부르는지, 왜 그걸 위해 운동장 먼지를 씹으며 발길질 당하고 욕지거리를 들어야 되는지, 왜 교장선생님께 충성을 외쳐야 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게 충성인가 싶었다. 그 때 교장선생님은 내가 입학할 때도 교장이셨고 내가 졸업할 때도 교장이셨고, 졸업한 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교장이시다. 그리고 학교 설립자의 아들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세상에, 충성이란 바치면 그 대가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그런 학교에 몸담고 있다면, 그러니까 교장의 형이 재단이사장이고, 앞으로도 재단에 태클 거는 세력이 없을 것 같은 학교에 있다면, 불온한 학생들은 즉각 정학이나 퇴학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은 밀대자루로 진압하곤, 순진무구(?)한 학생들을 배후 선동하는 전교조 선생을 색출해 퇴출하라는 요구에 쿨하게 자빠져 있을 수 있을까? 자빠져 있기는커녕 용감하게 앞선다면 교감은 그렇다 치고 주임자리는 얻지 않을까? 만약이다, 만약! 무궁화 몇 개 붙인 서장이나 방범과장 정도라면,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주권을 가진 국민에 충성할 것인가, 인사권을 쥔 권력에 충성할 것인가? 시민들의 안전과 인권과 헌법상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그 반대편에서 주는 만큼의 달콤한 대가를 보장할 수 있을까 고민할 것인가? 고민이나 할 것인가?
만약!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자 한다면, 회사를 건사하기 위해 쓰겠다는 비자금을 위해 기꺼이 이름을 빌려드리고, 불온한(?) 재판에서 온몸으로 회장님을 막아서고, 그 분을 대신해 구속조차 당할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한 분께만이라도 기특함을 인정받는다면 결국 오른팔 왼팔의 위치에도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충성으로 영화를 누리려는 자들이 너도나도 이쁨 받기 위해, 압수수색에 출국금지 날리고 구속하고 사법처리 방침 들이대고 심의권 허가권 틀어쥐고 세무조사에 감사, 심의 들이대기로 여기저기서 경쟁이라도 벌인다 치면, 당겨 줄 자리, 꽂아줄 낙하산, 나눠줄 공천 자리는 고만고만한데 후보자들은 운하가 되어 넘쳐흐르지 않을까? 경쟁이 치열하긴 하겠다. 만약이다, 만약!
진정 국민을 위하고, 시청자를 위하고, 시장경제의 룰을 지키고, 상식과 인권과 사람다움을 위한다는 것은 우로만 보고 충성하는 이들에겐 순진한 생각일 수 있을 것이다. 공화국의 일원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시민의 안녕과 인권을 보호하며 국민복지와 국가경제에 진정 올바른 방법으로 이바지하지 않아도, 오로지 충성할 때, 그것이 언제라도 심판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을 때, 고민 말고 의심 말고 닥치고 “우로~봣, 충성!” 목이 터져라 외치는 거다. 모두에게 분열(?)을 획책하며 한 목소리의 충성을 요구한다면, 영화 〈강철중〉에 나오는 ‘거성그룹’과 다를 바 무엇인가? 충성을 외치는 소리는 여기저기 쩌렁쩌렁한데, 메아리는 그리 길지 않다.
*이 글은 자전거일보에서 흔히 쓰는 “만약~” 필법을 충실히 따라 한 것으로, 현재적 사실에 ‘전혀’ 근거하지 않고 그냥 가정법으로 쓴 거라고 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걸로 오버 충성하는 집단에 불려 다니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