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여름 밤에 “엄마야!”하고 비명을 지르고 이불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TV에서 무서운 귀신이 나오는 것을 꼭 보고 자곤 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 오싹한 공포물로 무더위를 식혀줄 KBS 2TV <전설의 고향>이 9년 만에 부활했다.
오는 8월 6일 ‘구미호의 귀환’편을 시작으로 모두 8편이 방송되는 <전설의 고향>은 최근 한국 공포영화의 침체 속에 등장해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이야기는 유지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으로 옷을 입힌 <전설의 고향>은 연출진과 출연진의 면면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구성됐다. <쾌도 홍길동> 이정섭 PD, <한성별곡-正> 곽정환 PD를 비롯해 <드라마 시티> 등에서 짜임새 있는 연출력을 보인 이민홍 PD, 김정민 PD, 김용수 PD 등 5명의 PD가 모두 8편의 연출을 맡았다.
또한 ‘구미호의 귀한’(8월 6일)편의 박민영을 비롯해 ‘사진검의 저주’(8월 13일)편의 최수종, ‘귀서’(8월 14일)편의 안재모, ‘환향녀’(8월 20일)편의 이진, ‘기방괴담’(8월 27일)편의 이덕화, 이민우 그리고 이 밖에도 이정, 사강, 재희, 김사랑, 김하은, 박하선, 이영은 등 젊은 배우들이 안방극장을 찾아갈 채비를 모두 마쳤다.
그동안 <전설의 고향>이 신인 연기자들의 등용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배우로서 이들의 성장도 눈여겨 볼만하다. <전설의 고향>은 1970년대 1대 구미호 한혜숙을 비롯해 장미희, 선우은숙, 노현희, 박상아, 송윤아, 김지영 등 구미호를 비롯한 각종 처녀귀신 역할을 맡아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1977년 10월 18일 ‘마니산 효녀’편을 시작으로 처음 시작된 <전설의 고향>은 1989년까지 무려 573화가 방송되며 시청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이후 1996년에 부활해 1999년까지 방송된 <전설의 고향>은 소재반복 등을 이유로 폐지됐다 이번에 9년 만에 부활하게 됐다.
제작진은 “<전설의 고향>을 통해 우리는 이젠 귀를 통해 전해들을 수 없어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대신 들었고, 우리가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에 어린 향토담이나 ‘구미호’, ‘천년 묵은 이무기’나 ‘백일홍’ 같은 옛 이야깃거리들을 접할 수 있었다”며 “우리 아이들은 국적불명의 호러물이 아닌 해학과 풍자, 교훈과 미담이 함께하는 우리 문화의 열매를 접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야심찬 기획의도와 함께 <전설의 고향> 제작진은 까다로워진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현실감 있고 이전보다 세련된 영상을 제공할 계획이다. 와이어를 사용해 귀신이 하늘로 비행하는 부분들을 세련되게 연출하며, 불에 그슬린 얼굴 등 흉측한 모습들을 표현하는 특수 분장에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쓸 계획이다. 또한 과거 내레이션으로 교훈적 끝맺음으로 마무리하던 것과 달리 것을 없애 좀 더 공포물에 가깝게 연출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계획한 ‘권선징악’의 큰 이야기 틀은 그대로 가져간다. 특히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귀신들이 남아선호, 성차별, 재가금지 등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여성들로 하여금 한과 울분을 자아내게 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청나라로 팔려간 조선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환향녀’는 간접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해 재조명하려는 시도도 선보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번 <전설의 고향>이 올해 초 <드라마시티> 폐지 이후 처음으로 시도되는 단막극 형식의 옴니버스 연출임을 고려해 볼 때 이번 실험이 앞으로 KBS 단막극의 시금석이 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구미호와 얽힌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배경으로, 인간의 집단적 욕망과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귀신의 짓보다 더 잔인하고 흉악무도한 일들은 일상이 되고 그 안에 무고한 희생은 되풀이 된다. 반가의 선비들이 자기 가문의 여식을 칼로 찔러 우물에 던져야 하는 이유, 종손에서 종손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비서와 이대감 가문이 몇 백 년에 걸쳐 쌓아온 업보는 무엇일까. <한성별곡-正>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곽정환 PD가 메가폰을 잡는다.
아가야 청산가자/ 8월 7일 방송 (극본 박영숙, 연출 이민홍)
자식을 향한 어미의 사랑은 금수이건 인간이건 다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맹목적이다. 그래서 때때로 모성에 눈이 먼 어미들은 이성과 사회 규범을 넘어서는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와 원한이 갈마드는 인간 세상의 이치는 끝내 사필귀정을 부르는 법. 무속신앙, 오작 등 원색적인 전통 문화의 요소들을 소재로 애끊는 모정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한다. <전설의 고향>(1996~98), <불멸의 이순신>, <헬로 애기씨> 등을 집필한 박영숙 작가가 이번 이야기를 맡았다.
사진검(四辰劍)의 저주/ 8월 13일 방송 (극본 문은정, 연출 김정민)
전란의 후유증과 돌림병으로 백성들의 삶이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조선조 어느 시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전설속의 신검 ‘사진검’이 조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성수청 국무당에 의해 부활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사진검을 만들던 대장장이 마을에서 의문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포청의 무장 ‘윤인’이 파견된다. 신물 보검인 사진검을 만들며 맹목적으로 ‘전체를 위한 희생’을 좇을 때 잉태되는 비극을 인간적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귀서(鬼書)/ 8월 14일 방송 (극본 김정애, 연출 김용수)
최초의 한글소설로 ‘필화(筆禍)’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던 <설공찬전>을 모티브로 한 <귀서>는 조선 역사에서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임금으로 지목되는 인종의 야사를 기반으로 한다. 이야기는 화려한 궁궐 이면에 혈연간에도 서로의 목숨을 걸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여야 하는 비정함이 숨어 있음을 밝힌다. 인종과 문정왕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만인지상의 모자이지만 목숨을 건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궁궐의 이면을 통해 인륜마저 희생시키는 정치의 비정함을 다루고 있다.
환향녀(還鄕女)/ 8월 20일 방송 (극본 박영숙, 연출 이민홍)
1637년 1월 30일, 조선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병자호란은 끝났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돌아온 5만명의 환향녀 중 2만명은 환향녀라는 1년 안에 자살했다. 끌려가는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해 청군의 칼에 손목이 잘려버린 어린 아들. 그 아들이 눈에 밟혀 죽을 힘을 다해 고향에 돌아오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환향녀라는 손가락질뿐이다. 제작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아직도 계속되는 환항녀의 아픈 역사를 일깨우기 위해 이야기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퇴마사 이야기다. 하지만 귀신을 쫓는다는 서양적 의미보다는 죽은 이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 극락으로 보내준다는, 한 판의 씻김굿을 연상케 한다. 자신의 한을 짊어진 채 다른 이의 한과 억울함을 풀어주며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퇴마선비. 어느 강마을에서 느닷없이 직면하는 그의 사랑과 살풀이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죽은 이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 극락으로 인도하는 한국적 퇴마사의 무용담을 통해 우리 문화의 정수인 한(恨)과 정(情)을 재발견하는 이야기다.
기방괴담/ 8월 27일 방송 (극본 유은하, 연출 김정민)
향락과 흥취가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기방. 그 곳에 아름다운 다섯 명의 여인들이 있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을 함께한 이들은 이승의 인연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서로의 곁을 맴돈다. 인간의 오욕칠정이 소용돌이치는 기방을 배경으로 인간의 폭력과 탐욕을 목격하는 공포를 선사한다. 기방이라는 공간과 사연 하나 쯤은 품고 있을법한 기녀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탐미적인 화면 너머로 그 뒤에 꼭꼭 숨겨져 있을 인간성의 본질과 죽어서도 기방을 떠나지 못하는 기녀들의 사연이 펼쳐진다.
사신이야기/ 8월 28일 방송 (극본 김정애, 연출 김용수)
과연 귀신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누구나 한번쯤 가졌을 의문이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호기심이다.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던 말이고 온갖 매체를 통하여 보고보고 또 봤던 캐릭터들이다. 귀신 중에서 제일 무섭다는 처녀귀신부터 몽달귀신, 물귀신, 집 귀신까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엉뚱한 귀신을 등장시켜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켜줄 이야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