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뀔 때마다 휘둘리는 KBS 현실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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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사장 ‘해임’ 사태 맞은 KBS

KBS이사회(이사장 유재천)가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 제청안’을 의결한 지난 8일, KBS 내부 움직임은 긴박했다. 이날 아침 이사회 저지에 나선 직원은 200여명. 그러나 이날 오후 공권력 투입에 사실상 KBS 본관 심장부까지 뚫렸다는 소식을 접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이면서 어느새 이날 오후 집회 참가자는 500여명으로 불어났다.

KBS 곳곳에서 본관 로비 이른바 1990년 4월 투쟁의 상징인 민주광장에 몰려든 직원들은 “어떻게 언론사에 경찰력까지 동원될 수 있느냐”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노 섞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분노를 이기 못한 일부 직원들은 사내를 돌며 동료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지난 8일 KBS 내부에 경찰력 투입은 KBS직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경찰력 동원을 통해 KBS내부는 정권의 방송장악 의지를 제대로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듯 했다.

▲ KBS직원들의 자발적인 모임체인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이 11일 낮 12시 KBS본관 2층 민주광장에서 출범식을 갖고 이명박 정권의 초법적인 언론장악 시도에 대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KBS 건물 내부에 경찰력 투입에 대해 직원들 분개

방송 80년 역사에서 KBS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는 과연 얼마나 될까. 라디오본부의 한 PD는 “더 이상 길거리에서 돌팔매를 맞기 싫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땡전뉴스의 역사를 또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의지였다.

한 교양 PD는 “80년대 땡전뉴스, 90년대 무리한 시청률 경쟁으로 인한 수신료 거부운동, 2000년대 기계적 중립주의, 단 한번도 KBS는 국민의 방송이 되지 못했다”며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사내 조직원들 내에 공영방송이라는 가치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고 이런 성과는 정 사장 이후 KBS의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386세대 후배들의 투쟁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던 중간 간부들은 1990년 4월 방송 민주화 투쟁을 경험한 탓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최근 상황을 오히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20년차 KBS 보도국의 한 기자는 “1990년 4월 투쟁 이후 1999년 통합 방송법 제정을 앞두고 총파업이 벌어지긴 했지만 KBS내부까지 침범하지 못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사정보팀의 한 PD도 “방송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며 지금까지 공영방송 KBS를 쌓아왔는데 5공 시절도 아닌 20년이 지난 지금, KBS 내부에 다시 경찰이 투입되는 광경을 보게 될지 몰랐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이 강제로 교체되는 현실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안타까울 뿐”이라고 허탈해했다.

이런 이유일까. 보직 팀장들의 도미노 사퇴도 조심스럽게 예측되고 있다. 지난 11일 이장종 환경정보팀장은 ‘정연주 사장’의 강제 해임에 반발하며 사내 게시판에 ‘보직사퇴’를 선언했다. 이 팀장은 “공영방송 최고 책임자로서 정연주 사장의 리더십과 철학, 그리고 그분의 도덕성에 대한 평소의 신뢰와 존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퇴 이유를 밝히며 “‘이 정권의 국정철학’을 잘 구현할 신임사장이 왔을 때, 그것을 감내할 용기도 없고, 내 양심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 때문이다. 그 어떤 권력도 공영 방송인으로서의 내 양심의 자유를 침범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연주 사장 해임을 바라보는 ‘KBS’의 두 얼굴

그러나 정연주 사장의 해임 사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직원들도 있다. 장기 경기침체로 광고 악화는 물론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등 경영수지가 악화된 상황에서 소모적인 정치 논란에 염증을 느낀 탓일까. 아니면 오래된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 KBS이사회가 열린 지난 8일,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KBS직원들이 KBS 본관3층 TV 부조정실-5 계단을 통해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선임 팀원을 맡고 있는 한 직원은 “사장으로서 직원들에게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제작본부 쪽은 침체됐고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일부에서는 최근 2~3개월을 되돌아보면 사실상 모든 권력기관들이 KBS의 비리를 찾겠다고 들쑤시고 다닌데 따른 일종의 피해의식일 수도 진단한다. 감사원은 500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주민등록번호까지 요구하며 ‘KBS 비리찾기’에 혈안이 됐고 심지어 연예기획사 비리 수사에 일부 PD들까지 거론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부 KBS직원들의 평가에 대해 한 행정직의 직원은 정연주 사장에 대한 “애증의 소산”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정연주 사장의 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노사 동수의 공정방송위원회 구성 등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들도 마련됐지만 어찌 보면 모든 직종에서 적용된 것은 바로 팀제 전환이다. 팀제 전환 과정에서 보직이 박탈된 간부들의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일 중심 조직을 만들고 슬림화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취지는 어느새 이들의 문제제기로 퇴색해지게 됐다.

또 다른 이유에서 보도국의 한 직원은 “정연주 사장에 대한 애증과 직종별 갈등은 직결된다”며 “정 사장이 취임한 이후 직종별 갈등이 불거졌다. 사원행동 출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PD, 기자직에 비해 정연주 사장 해임 저지에서 가장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 ‘기술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며 비판했다.

KBS의 한 책임 프로듀서(CP)는 좀 더 근본적으로 KBS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연주 사장이 취임하고 ‘팀제’ 도입, 사내 개혁의 일환으로 기술직에 대한 구조조정 언급, 인력 미확충하면서 정 사장에 대한 상급자들, ‘기술직’의 불신이 커진 것 같다”며 “전체 예산 또한 빡빡하게 운용되면서 기술직이 PD, 기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 사장 해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철밥통=KBS’라는 공식을 정 사장이 깨뜨린 것에 대한 반발도 함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KBS 기술직에 종사하는 한 직원은 이 같은 평가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정연주 사장에 대한 기술직 직원들의 불신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의 기술인들이 그런 정서는 아니”라며 “하지만 현재 KBS기술인협회 집행부가 다른 직능단체들과 연대하지 않고 ‘반정연주’ 입장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탄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KBS의 10년차 PD는 “정연주 사장이 공무원 조직같던 KBS에 팀제를 도입하면서 수평적 문화를 정착하면서 제작의 자율성이 확보됐고 KBS가 일반 기업과는 다른 언론사로서 KBS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이로 인해 젊은 PD들이 자신의 역량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도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보도제작국의 한 기자도 “박권상 사장 때만해도 사장이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대해 개입했지만 정연주 사장은 개입은 최소화 하면서 자유의지에 맡겼다”며 “그랬기 때문에 이전에는 KBS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인물현대사〉,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팀제로 인해 직급 승진이 늦어졌다고 밝힌 KBS의 한 선임 팀원은 “개인적으로는 정연주 사장이 모든 정책에서 현명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하지만 팀제 도입이 대승적인 입장에서 KBS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KBS 노조, 이제 주저하지 말고 나서라 

그러나 현재 당면한 숙제는 당장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이다.  정권의 정연주 사장의 조기 사퇴는 ‘낙하산 사장’을 내려 보내기 위한 수순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KBS노동조합(위원장 박승규)이 KBS 내부 곳곳에 걸어놓은 만장과 대자보는 KBS직원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KBS노조는 현재 전국언론노조 탈퇴를 결정짓는 찬반투표를 준비하면서 상급단체인 언론노조의 로고를 빼고 KBS노조의 로고로 바꿔놓은 상태다.

대자보를 보던 한 PD는 “KBS노조가 있는데도 ‘사원행동’이 출범한 건 KBS노조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KBS의 ‘낙하산 사장’을 막는 일은 KBS 내부 구성원만으로 대항하기 어려운 싸움으로 외부 단체와의 연대가 중요한 시점인데 언론노조 사퇴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성토했다.

현 KBS노조는 그 동안 정연주 사장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면서 “‘낙하산 사장’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언론시민단체 관계자, 시민들은 “공영방송 수장의 임기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대하지 못했다. 때문에 KBS노조는 정권, 여당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KBS안팎의 비판을 받으며 정체성의 의혹을 받아왔다.

이런 KBS노조의 행보 때문에 일부 KBS직원들의 불신은 극에 달해 있는 듯 했다. 특히 지난 8일 오전 열린 KBS 임시 이사회가 열리는 KBS 본관 3층 제1회의실에서도 직원 100여 명이 청원경찰, 사복 경찰 등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서도 KBS노조원들은 구호 한 번 외치지 않았다. KBS 이사회가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통과한 뒤 KBS노조 집행부가 낙하산 사장 저지 의지를 다지며 집행부 삭발, 청와대 앞 1인 시위 등을 진행했지만 사내 반응은 싸늘한 편이다.

이런 KBS노조에 대한 비판과 불신은 사내 곳곳에서 드러났다. KBS의 한 기자는 “노조가 유일한 교섭단체이고, 낙하산 사장 저지에 직원들이 가장 큰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파업’이라고 할 때 이 권한은 모두 노조가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럼에도 내부 동력을 모으는 데 노력하지 않고 잘못된 방향만 갖고 있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KBS직원들은 “KBS노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KBS의 8년차 기자는 “KBS 직원들은 결속할 수 있는 충분한 내부 역량이 모여 있는 상태”라며 “이제 낙하산 사장을 얼마나 막아내느냐에 따라 KBS의 앞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KBS노조는 대승적 차원에서 직능단체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팀장을 맡고 있는 KBS의 한 PD는 “낙하산 사장이 온다고 해서 ‘땡전 뉴스’를 하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KBS노조가 왜 생겨나게 됐는지, 공영방송을 지키는 일이 방송민주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언론 선배와 시청자에게 부끄럽지 않는 최소한의 일이라는 점을 현 노조 집행부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역사는 이번 싸움을 2008년 8월 투쟁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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