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대책모임 폭로가 며칠만 늦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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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주간 미디어 리뷰]

▲ 이희용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8월 25일 KBS 이사회가 이병순 KBS비즈니스 사장을 차기 KBS 사장으로 임명제청한 데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8월 26일 이 사장을 KBS 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법적, 정치적 논란과 KBS 내의 공방이 뜨겁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연주 사장 해임 이후의 절차가 일단락된 셈입니다.

인간사가 새옹지마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게 세상일인 것 같습니다. 김인규 전 KBS 이사가 공모 포기를 선언한 이후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는데 이른바 청와대 대책모임이 8월 22일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새로운 변수가 돌출했습니다. 청와대 개입 의혹이 제기되자 KBS 노조도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은구 전 KBS 이사에 대한 반대를 선언했고, KBS 이사회는 결국 이병순 씨를 선택했지요.

만일 25일 김은구 씨가 낙점된 직후 청와대 대책모임이 불거졌다면 대통령도 임명을 주저하게 되고 노조와 사원행동도 똘똘 뭉쳐 낙하산 저지 투쟁에 나섰겠지요. 일각에서는 KBS 후임 사장 반대 투쟁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키려면 경향신문이 며칠 늦게 터뜨리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더군요.

청와대의 대책모임이 KBS 사장 후보를 면접하고 낙점자를 사전 조율한 자리라는 의혹을 사실로 가정한다면, 김은구 씨로서는 경향신문이 괘씸할 것이고 이병순 씨로서는 고마울 겁니다.

이 사장의 임명을 두고 방송계 안팎에서는 여러 가지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정 사장의 해임에서부터 이 사장의 임명에 이르기까지의 이사회 절차가 불법적이었고 청와대가 개입했으니 원천 무효라는 주장, 이사회 절차에는 심각한 하자가 있고 청와대의 개입 의혹이 있기는 하나 이 사장 자체는 낙하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 이사회 절차에는 문제가 없고 오히려 친 정연주 세력이 불법적으로 이사회 진행을 방해했다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지요.

KBS 내부에서는 이사회 의결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사원행동 측과 낙하산 사장이 아니라고 규정한 노조 측이 대립하는 형국을 보이고 있습니다. 8월 27일 이병순 신임 사장의 출근을 놓고도 사원행동은 저지에 나선 반면 노조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지요. 김인규 씨를 내심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정상화비대위는 사원행동을 표적으로 삼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KBS 사원들의 반발은 한동안 계속되겠지만 새로운 변수가 없는 한 일단 이병순 사장의 퇴진으로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사원행동은 근로자들의 대표조직인 노조를 대체하는 수준은 아니고 기자와 PD들을 중심으로 한 한시적 모임이니까요. 더욱이 사원행동을 이끌어온 양승동 PD연합회장과 김현석 KBS 기자협회장의 임기가 다음 달로 끝나 새 회장이 들어선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결속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높지요. 신임 사장도 자신이 사장임을 부인하는 임의단체를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겁니다.

다만 사원 내부의 갈등 구도는 11월 노조의 새 집행부 선거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 노조 집행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정연주 사장 퇴진과 김인규 전 이사 입성 저지를 투쟁성과로 내세울 것이고, 사원행동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조의 잘못된 선택이 정권에 의한 방송 장악을 불러왔다고 공격할 겁니다.

노조는 성명을 통해 "공사 출범 이후 35년 동안 갈망해오던 첫 KBS 출신 사장이 임명됐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전폭적으로 환영하는 뜻을 내비치지는 않았지요. 노조는 이 사장에게 ▲정치 독립적인 사장 선임 제도화 ▲조직을 추스르고 내부를 통합해 급변하는 방송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 ▲재원 확충과 구성원의 고용 안정을 이룰 수 있는 구상 제시'를 요구했습니다.

▲ KBS 이사회 회의 장면 ⓒKBS

감사원이 내세운 정 사장 해임 요구의 근거 가운데 하나가 방만한 경영이었고, 보수신문 등이 차기 사장의 과제로 강력한 구조조정을 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민감한 문제가 세 번째일 겁니다. 이 사장이 구조조정의 칼을 휘두르려 한다면 노조도 사장 반대 투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원행동 측은 이병순 씨를 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한다면 첫 번째 요구사항으로 보도와 제작의 자율성 보장을 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정 사장을 공격하는 측에서 내세운 것이 게이트 키핑 기능의 실종이어서 이 사장 처지에서는 순순히 수용하기 어려울 겁니다.

정치권의 기류도 KBS 내부와 유사하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민주당ㆍ민주노동당ㆍ창조한국당은 의원 90명이 서명해 방송장악 실태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요구서를 제출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데 비해 자유선진당은 청와대 대책모임 등에 대해서는 문제 삼았으나 신임 사장 임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요. 한나라당은 "정치적 개입이나 고려 없이 이사회의 독자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는 때에는 특별위원회 또는 상임위원회로 하여금 국정의 특정사안에 관해 조사를 시행하도록 돼 있으며, 의장은 조사요구서가 제출되면 지체 없이 본회의에 보고하고 교섭단체 대표와 협의해 특별위를 구성하거나 해당 상임위에 회부해 조사위원회를 확정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조사계획서를 본회의에 제출해 승인을 얻은 뒤 조사를 시행해야 하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원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고 자유선진당도 국정조사에 반대하고 있는 상태에서 실제로 조사가 시행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나라당으로서는 이제 막 어렵사리 상임위원장 배분을 마친 데다 추경예산안 심의, 3개 부처 장관 인사검증, 김황식 감사원장 후보자 및 양창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등을 앞두고 있어 야당의 요구를 무시하기만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문제는 국정감사, 언론관계법 개폐 논의에 이어 내년 예산안 통과 등으로까지 연결돼 여야의 뜨거운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신 교수에게 또 '미뤄 조지는' 부산지법

법적 논란도 쉽게 가라앉을 분위기는 아닙니다. 정연주 사장이 낸 해임집행정지 가처분신청과 이사회 결의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은 기각됐지만 본안 소송이 남아 있고 정 사장을 배임혐의로 기소한 공판에서도 공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또한 민주당은 청와대 모임 참석자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할 것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언급했듯이 신태섭 전 KBS 이사가 동의학원을 상대로 낸 교수 해임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신 이사가 대통령과 방통위원회를 상대로 낸 KBS 보궐 이사의 임명금지 가처분신청도 받아들여지게 되고 신 교수 해임 이후 KBS 이사회의 결정에 대한 논란도 다시 뜨거워질 테니까요.

▲ 신태섭 전 KBS 이사

그런데 부산지방법원 제14민사부는 가처분신청서 제출 52일 만에 처음 연 심리에서 양측 변호인의 주장을 들은 뒤 신 교수가 KBS 이사회에 참석하면서도 강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KTX 열차 탑승기록을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하며 3주 뒤인 9월 11일 심리를 속행하기로 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가처분제도는 확정판결이 있기 전에 신청자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는 등 소송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경우를 막기 위해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한 제도입니다. 이렇게 질질 끌어서는 신 전 이사는 물론 정 사장을 비롯한 관련자와 동의대 학생 등에게 미칠 피해를 막을 수는 없겠지요. 가처분결정의 시한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미뤄지는 것은 아마도 기록적인 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정을병은 1974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발표한 단편 '육조지'를 통해 "집구석은 팔아 조지고(재판비용과 생계비를 마련하느라 세간을 팔고), 죄수(수형자)는 먹어 조지고(교도소에서 사식이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먹고), 간수(교도관)은 세어 조지고(틈만 나면 수형자 숫자를 헤아려 괴롭히고), 형사는 패 조지고(자백을 받기 위해 구타하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구치소에서 소환해 신문하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재판 기일을 미뤄 괴롭힌다)"고 풍자하고 있습니다.

인권이 깡그리 무시되던 70년대 이야기지만 부산지법의 태도를 보며 이 소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한 변호사는 제게 "기자들이 그런 것 안 조지고(비판하고) 뭐하느냐"는 핀잔을 주던데, 기자들이 비판기사를 쓰는 것까지 포함하면 '육조지'가 아니라 '칠조지'가 되나요.

혹시라도 KBS 새 사장 체제가 안착하고 2학기가 시작된 지 한참 후에 "당장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다 해도 신청자가 누릴 실익이 없고 혼란이 초래된다"는 이유로 기각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가처분제도의 취지에 맞게 조속히 결정을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질질 끈 뒤 이런 핑계를 댄다면 따가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 언론노조는 14일 방통위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 관련 공청회에 앞서 공청회장인 서울 목동 방송회관 3층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통위원들은 공청회에 출석해 토론에 임하라”고 요구했다


방송법시행령 개정 2차 공청회는 제대로 열릴까

방송통신위원회는 8월 14일 열려다가 무산된 방송법 시행령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9월 9일 오후 2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14일 공청회 때는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 결정에 책임을 지고 있는 방통위원이 직접 발제자로 나서지 않았고 ▲패널 가운데 지역방송 관계자가 빠졌으며 ▲시청자단체 대표 대신 정치단체인 뉴라이트전국연합 관계자가 참석했고 ▲공청회 사전 고지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거세게 항의해 2시간 30분 동안 파행을 거듭한 끝에 무산됐지요.

방통위는 지난번 공청회 때 참석했던 최성진 서울산업대 매체공학과 교수와 박균제 법무법인 렉스 변호사와 함께 언론개혁시민연대,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한국방송협회, 한국DMB, 한국케이블TV협회, 한국PP협회, 한국디지털위성방송, 한국지역방송협회 추천인과 학계 2인 및 시민단체 1인을 토론자로 추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방통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온라인, 공문, 공청회 발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견 제시가 가능함에도 패널 선정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유 등으로 공청회 개최 자체를 반대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유감을 표시한 뒤 "당시 언론단체가 지적한 사항을 최대한 수용해 패널을 보완한 만큼 이번에는 공청회에서 질서 있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토론문화를 기대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언론노조는 "대기업의 방송 진출 확대는 중차대한 문제인 만큼 실무자인 김성규 방통위 방송정책기획과장이 발제자로 나설 것이 아니라 결정권자인 방통위원 두 명 이상이 발제자와 토론자로 직접 나서야 한다"며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방통위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언론노조에 책임을 미뤄 언론노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면서 공식 사과를 요구했지요.

언론노조와 지역방송 등이 이번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은 대기업 기준을 자산 3조 원에서 10조 원으로 늘리면 재계순위 24위부터 33개 기업들에 지상파, 보도 및 종합편성채널 진출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케이블TV의 시장점유율 한도를 늘린 것에 대해서도 지상파방송 등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언론노조 등은 KBS 사장 문제와 함께 방송법 시행령 개정도 신문-방송 겸영과 공영방송 민영화 등을 통한 방송 장악 기도의 일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토론이 이뤄지기가 힘들지요. 이런 논란은 국회가 제대로 가동돼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때도 계속 이어질 겁니다. 한쪽은 결사반대하고 반대쪽은 밀어붙이려고 하면 타협과 설득에 의해 바람직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어찌 보면 정파적 대립보다 더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업자간의 이해다툼입니다. 규제 완화를 통한 효율성 제고라는 목표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규제의 방향과 수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피해를 보는 사업자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렇다고 이에 반발하는 사업자들을 미디어산업 성장에 발목을 잡는다고 비난할 수만도 없습니다. 공공성 확대, 매체간 균형발전, 여론 다양성, 소외계층 보호 등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명분이 그들에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KBS 사장 해임 및 임명 과정이나 YTN 등에 대한 인사, 독과점적 신문이나 대기업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한 여권 관계자의 발언 등으로 야권 및 나머지 사업자들에게 잔뜩 의심을 키워놓았으니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에서 제공했습니다. [이희용 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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