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로벌] 런던=장정훈 통신원/ KBNe-UK 대표

# 풍경 1. 대통령 초청 시민 토론

시민: 국민이 싫다는데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를 왜 수입 합니까?

대통령: 광우병 위험 없어요. 그건 방송이 불안을 조장 한 겁니다.

시민: 방송은 0.1 %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렇게 한거죠. 우리 국민은 바보가 아니예요.

대통령: 그래도 들어오면 다 드실 거면서….

시민: 누가 그래요? 다 먹을 거라고? 당신 정말 대통령 맞아요? 당장 사퇴하세요.

# 풍경 2. 기자와 장관의 인터뷰

기자: 낙하산 인사라는 지적이 많은데 자랑스러우신가요?

장관: 무슨 질문이 그렇습니까? 조금 전에 장관임명을 받았는데 축하부터 해 주셔야죠.

기자: 일각에선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라고 하는데 (장관 된 게) 자랑스러우시냐고요.

국회의원: 그냥 다음질문 하세요.

기자: 아직 제 질문에 답 안하셨어요.

장관: 경력과 능력을 보고 임명한 대통령과 국민에게 모욕적인 말 하지 말고 다음질문 하든지 아니면 이 인터뷰 그만 하겠습니다.

기자: 협박하는 겁니까? XX라는 사람 아세요?

장관: 그게 누군데요? 전 몰라요.

기자: 얼마 전까지 의원이었어요. 당신의 동료의원이요.

장관: 몰라요. 그런 사람.

기자: 그럼 당신이 아는 게 대체 뭡니까?

# 풍경 3. 아나운서와 국회의원의 인터뷰

앵커: 불법 과격시위로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세력들이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국회의원: 누가 불법시위로 사회불안을 조장해요? 왜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고 보도를 합니까?

앵커: 허가받지 않은 시위를 하고, 경찰차를 부수고…. 그건 불법이잖아요.

국회의원: 여보세요. 당신 방송사의 보도는 사장의 입맛에 맞춰 늘 그런 식이예요.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요. 사회불안을 조장한건 정부고, 국민은 정부에 반대해 집회를 한 겁니다. 일부 폭력적인 장면이 있었다고 불법으로 온 국민을 매도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앵커: 경찰도 많이 다쳤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 당신 바보예요? 경찰보다 시민이 더 많이 다쳤어요. 경찰은 진압장비를 가지고 있잖아요.

앵커: 질문을 가로채지 마세요. 아직 질문이….

국회의원: 내가 지금 당신 방송국 TV화면을 보고 있는데 내 인터뷰 반대쪽 화면에 경찰이 맞는 장면이 나오고 있어요. 시민이 잡혀가는 장면은 어디 있어요? 그러고도 공정방송 입니까? 창피한 줄 아세요.

▲ 공격적인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제레미 팍스만 기자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BBC
영국의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뷰 광경을 과장 없이 우리나라 TV로 가정해 옮겨봤다.

<풍경1>은 일반 시민과 최고 정치 권력자가 TV에 출연해 질문과 답을 하는 장면이다. 시민은 원하는 질문을 원하는 감정에 실어 전달한다. 시민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고, 정치 권력자는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방송은 이들이 자유롭게 질문과 답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보장한다. 시민은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정할 필요도 없고, 사전에 누군가에게 알려줄 필요도 없다. 대화중에 어떤 감정을 드러내든 그것 또한 소통을 위한 대화의 한 방식일 뿐이다.

<풍경2>는 스튜디오와 현장을 연결한 생방송이다. 질문을 하는 기자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야 말겠다는 시선으로 인터뷰이를 노려(?) 보면서 거침없이 질문을 퍼붓는다. 장관 또한 절대 말려들지 않겠다는 기세다. 둘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은 K1을 보는 느낌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기자 쪽에 실려 있다.

<풍경3>은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방송사에 출연한 한 야당 국회의원의 인터뷰 장면이다. 국회의원의 판정승이다.

그렇다. 영국의 방송 인터뷰는 종종 한편의 청문회를 보는 듯 신랄하기도 하고 격투기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때로는 싱겁게 무승부로 끝나기도 하지만 입심 좋은 사람을 만나면 기자나 앵커들도 쩔쩔매기 일쑤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사안에 대해 변명을 하기란 쉽지 않은 법. 작정한 듯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표정으로 무장한 채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는 인터뷰이에게 기자는 아홉 번, 열 번씩 똑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반복하기도 한다. 서로 뜯고 비틀다 마이크를 떼버리고 박차고 나가는 상황은 인터뷰를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여기서 재미라 함은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의미한다.

영국의 인터뷰나 토론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궁금한 게 생긴다. 저렇게 망신을 당하면서 왜 인터뷰에 응하는 걸까? 또 고관대작들을 식어버린 밥쯤으로 취급하는 언론의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래도 명색이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수상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어딘가에 언론이 부르면 무조건 응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그런 종류의 의문을 가지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국이 어떤 나란가? 흔히들 민주주의의 발상지라고 하지 않던가. 민주주의가 뭔가? 소통이 아닌가. 모든 국민은 평등함으로 자유롭게 소통을 하고 그 소통을 통해 합의하고 질서를 찾고, 개인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 나가는 뭐 그런 거 아니던가.

소통을 피하고, 소통을 통제하는 나라를 가리켜 우리는 ‘독재’라 하고, ‘파쇼’라 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니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으려면 망신을 각오하고라도 나와야 하고,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올바른 소신을 갖춰야 하고, 그런 소신을 언론매체를 통해 자신있게 설파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거다. 당연한걸 보면서 의문을 가지다니 아직 내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음이다. 물론 영국은 민주주의 국가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국가다. 어떤 식으로든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유명세를 타고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다지려는 심리도 없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토론이나 인터뷰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영국방송은 공론의 장으로 제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심하다 생각이 들 정도로 기죽지 않고 덤비고 비트는 언론에 맞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당당히 표현하는 고관대작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소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언론이라는 공론의 장으로 나온 이상 높고 낮음은 없다. 높은 사람은 체중을 낮추고, 낮은 사람은 체중을 높여 대등한 체급이 되어 공정한 경기를 벌이는 거다.

공론의 장인 방송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국회의원은 편파적인 방송에 출연해 소리 높여 방송의 편파성을 지적할 수 있다. 언론인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준엄히 꾸짖고 추궁할 수 있다. 그렇게 방송은 ‘소통의 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편파적이다 하여 응하지 않고, 통제하려 들고, 권력에 대한 예를 갖춘답시고 언론의 역할을 저버리는 방송은 소통이 없는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영국 방송을 보면서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미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고 자란 티를 내는 것에 다름이 아니리라.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게다. 난 선거만 민주적인, 소통부재의 독재국가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대한민국 사람 아니던가.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