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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정길화 MBC 정책협력팀장/본지 자문위원

 연기자 최진실이 사망했다. 그것도 자택에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10월 2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나는 인터넷에 이 기사가 속보로 뜨자 망연자실했다. 한국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나 는 이 소식이 믿어지지 않았다. 바로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 채널을 이러저리 돌렸다. 이후 그녀의 사망이 경찰에 의해 확인되고 병원으로 운구되는 등의 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최진실의 사망은 당일 방송 3사의 메인 뉴스의 톱에 오르고 지난 며칠 동안 부검, 발인, 화장, 봉안 등의 과정이 지상파와 케이블 TV로 샅샅이 전해졌다. 대한민국의 인터넷 포탈은 그녀와 관련된 세세한 뉴스로 도배됐다.

 최진실. 국민배우의 반열에 오른 그녀를 누구라도 친근하게 여기고, 또 방송가에는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인연을 맺은 이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내게는 그녀가 좀 더 각별하다. 지난 1991년 11월 필자가 <인간시대>를 연출할 때, 최진실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한 사람의 시청자이거나 혹은 특별한 인연이 없는 한 명의 방송프로듀서에 불과했을 것이다.

▲ MBC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당시 필자는 <인간시대> PD로서 스타 최진실의 애환을 담은 ‘최진실의 진실’을 연출한 바 있다(기획 이긍희, 작가 박명성, 촬영 김경철). 이때의 최진실은 ‘남편 귀가시간은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모 전자회사 CF로 신데렐라가 되어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조선왕조 오백년>에서의 배역은 단역이었으나, 최진실은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영화 <남부군>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등을 거치며 서서히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때까지 그녀는 CF를 통해 운 좋게 인기를 얻은 벼락 스타, 반짝 스타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시대>의 포인트는 연예계의 신데렐라 최진실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녀의 애환은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인간시대>에서 이른바 유명 인사가 등장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그 이전에 배우 안성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왜 난데없이(?) 최진실을 주인공으로 하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여기저기서 꽤 많이 질문을 받은 것 같다.

 이 때 나는 연출자로서 답하기를 “첫째로 <인간시대>의 끊임없는 변화 모색, 두 번째로 불우했던 과거를 딛고 스타덤에 오른 최진실이 주는 <인간시대>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적인 매력”을 들었다. 사실은 1991년 초 <인간시대>를 맡은 이후 일곱 번째 프로그램을 연출하게 된 나 자신의 변화 추구가 더 시급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최진실도 처음에는 왜 자기를 <인간시대>에서 다루고자 하는지 궁금해 했으나 곧 대본도 연기 주문도 없는 <인간시대>를 매우 편하게(?) 여기며 “본 대로 느낀 대로” 자신을 말해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열흘 남짓, 최진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아 촬영은 진행되었다. 그 기간 중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 <숲속의 방>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고, KBS <사랑방 중계>, MBC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녹화 일정이 있었다. 사이사이 최진실의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는 시츄에이션이 자연스럽게 확보되었다. 수제비, 졸업앨범 등 가난했던 시절의 일화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당시에 최진실은 계속되는 스케쥴로 인해 힘들어 보였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나 비판적인 의견에는 민감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 보였지만 일시적인 현상이고 젊은 나이라 스케쥴만 잘 조정되면 곧 회복될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녀가 불면증으로 밤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해 <인간시대> 제작진 또한 낮과 밤이 바뀌기도 했다.

 1991년 11월 18일 방송된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의 마지막 장면은 어릴 때 꿈이 화가였던 최진실이 불현듯 화폭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정경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어릴 적 미술대회 입상 경력도 있고 집안에 습작 정물화가 걸려 있기도 했다. 그녀가 인기를 좇아 바쁜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그 꿈을 잊었다가 어느 날 붓을 들어보았지만 - 내심 카메라 앞에서 보란 듯이 그려 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자 "엄마, 그림을 못 그리겠어. 너무 슬퍼"라고 하며 눈물을 보였다. 바로 이때 최진실의 클로즈업에서 화면은 조그(jog)로 정지되고 <인간시대> 시그널과 함께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인간시대> 최진실 편을 만든 직후 내게 연출 소감을 묻는 매체들의 질문에 대해 “화려한 스타의 삶은 드러난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인기를 얻는 대신 무엇인가를 잃어간다는 느낌으로 아픈 시간들이 있었다. 어쩌면 스타는 대리 만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한겨레 91년 12월 6일) “인기를 얻고 스타는 되었지만 자신의 중요한 존재 근거중의 하나였던 그림 그리는 법을 잊어먹고 망연(茫然)하게 ‘생각이 안 나’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우리는 가열한 현실에서 부대끼며 자아와 꿈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을 되찾고 내면화하는 것은 최진실에게 주어진 과제다. 부디 이번 <인간시대>를 계기로 최진실이 반짝스타가 아닌 진정한 연기자, 성숙한 연기자로 자리잡게 되기를 바란다.”(TV저널 91년 12월)라고 답했다. 필자가 17년 전에 했던 말이다.

 방송 직전 서브타이틀(부제)을 정하기에 앞서 ‘최진실의 진실’과 ‘신데렐라’를 놓고 고심했던 것이 생각난다. 사실은 ‘신데렐라’로 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너무 가혹한 느낌이 들어 ‘최진실의 진실’로 정했던 것 같다. 베테랑 작가 박명성의 내래이션은 그녀의 삶에 범상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했다. 출연자의 유명세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청률은 45% 전후로 공전의 기록을 올려 기획의도의 한 부분을 달성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그녀의 이른바 ‘헝그리 마케팅’은 끝나고, 비로소 연기로 승부하는 진짜 연기자 세계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91년 11월 <인간시대> 이후 최진실은 순풍을 탔다. 영화 <숲속의 방>으로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질투>, <마누라 죽이기>, <별은 내 가슴에>, <편지>, <약속>, <그대 그리고 나>... 등 은막과 TV를 가리지 않고 또 엄청난 물량의 CF를 소화하며 90년대를 그녀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반짝 인기를 얻고 사라지는 단명의 스타가 아닌 호흡이 긴 연기자를 꿈꾸며 김혜자, 고두심 같은 선배처럼 되고 싶다고 했던 그녀의 소망이 점차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스타>의 저자 애드가 모랭은 “신인은 몸으로 말하고 스타는 영혼으로 말한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몸’이 외피 즉 마케팅과 홍보라고 보고, ‘영혼’은 내면 즉 진정성과 연기력이라고 했을 때 최진실은 비로소 영혼으로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내가 제작 현장에서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94년 연말이다. <인간시대>는 <신인간시대>로 바뀌어 있었는데 이 때 신년특집으로 ‘앞서가는 한국인 50인’이라는 제목으로 분야별 스타를 조명하게 되었다.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한 이 ‘앞서가는...’에서 최진실은 안성기와 함께 남녀 연기자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여러 PD가 함께 작업한 이 특집 프로그램에서 최진실에 대한 취재는 당연한 모양새로 내게 주어졌다.

 당시 최진실을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제작 현장에서 만나 인터뷰를 촬영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 때 그녀의 분위기는 사뭇 안정되어 있었고 여유로웠다. 톱스타로서 풍기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종전 <인간시대>에 최진실이 나온다는 것은 기사가 되었는데 이제 <신인간시대>에 최진실이 나오는 것은 기사가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최진실은 PD로서 나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인간시대>와 <신인간시대> 이후 내 활동영역이 < PD수첩>과 같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으로 옮겨간 때문도 있지만 일개 교양 PD로서는 이렇다할 업무상 관련이 없어진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중 2000년 연하의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과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결혼식을 앞두고 최진실이 MBC 방송센터 4층에 있던 교양제작국 사무실로 직접 청첩장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인간시대>의 인연을 그녀도 기억했던 것이다.

 그 결혼 이후의 상황은 수많은 연예저널리즘과 인터넷 포털 덕분에 이미 다들 너무도 시시콜콜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제는 ‘알 권리’를 넘어 ‘모를 권리’, ‘알고 싶지 않을 자유’까지 넘나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에 관한 볼썽사나운 소식이 각종 매체에 가득할 때 그래도 한때 <인간시대>를 했기 때문인지 남다른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마침내 그녀는 상처투성이로 이혼했고 그 이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IT 강국 한국의 인터넷과 난립한 연예저널리즘은 그 모든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그녀는 참담하게 상처받았고 허물어졌다. 하지만 2005년 KBS <장밋빛 인생>으로 재기에 극적으로 성공했다. 앞선 몇 번의 드라마에서 실패했으나 이를 굳세게 딛고 일어섰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캐스팅한 PD의 결단이 빛났다.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맹순이 역할을 신들린 듯 처절하게 연기하는 최진실을 나는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보며 자못 귀기(鬼氣)를 느꼈었다.

 이후 그녀는 MBC로 돌아와 2008년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을 통해 '친정’에 보은을 했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줌마렐라’라는 신조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옛날 ‘신데렐라’에서 이제는 ‘줌마렐라’로, ‘국민요정’에서 ‘국민아줌마’가 된 것이다.

 최진실은 <내 인생 마지막 스캔들>로 올 연말의 MBC 방송대상에서 베스트 커플상을 꿈꾸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또 여세를 몰아 내년 초 <내 인생의 마지막 스캔들 2>의 출연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별 일’이 없었으면 최진실은 17년 전 그녀가 꿈꾸었던 것처럼 반짝 인기가 아닌 호흡이 긴 배우로서 연륜과 경험이 우러나는 그런 연기를 하며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최진실에게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2008년 가을의 비극이 엄습한 것이다. 지난 9월 탤런트 안재환의 자살 시신 발견에서 10월 2일 최진실의 자살까지의 과정을 굳이 상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고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사흘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극도의 우울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여러 논의 중에서도 나는 “한국 사회에 내재된 여러 병리현상들이 위험수위를 넘어섰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진단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스타를 향한 동경과 경멸이 여자 연예인에게 더욱 왜곡되어 투사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톨레랑스 없는 사회에서 이는 더욱 가학적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애드가 모랭은 “스타가 신의 위치에서 인간의 위치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스타에 대한 신비주의나 대리만족보다는 일상성 속에서 스타를 선호하고 스타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경향 때문일 것이다. 최진실이 데뷔했던 20세기는 아날로그 시대로 그녀는 대중에게 ‘코리언 드림’과 같이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최진실은 그녀 자신이 인과론적 원인이 된 삶의 기복으로 인해 질시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연예저널리즘의 생산과 유통의 회로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된 대중은 그렇게 최진실의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소문과 가십은 스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인지도를 높이기도 한다. 애드가 모랭은 “소문과 가십은 스타 시스템을 키우는 플랑크톤”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플랑크톤이 지나치게 많으면 물은 부영양화(富營養化)를 이루고 썩는다.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 실명제와 사이버 모욕죄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최진실법’을 추진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에 대해 이는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뿐이며 그보다는 ‘자살방지법’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통계자료를 보면 악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보다는 검증되지 않은 악플을 기사로 만들어 기정사실화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부 인터넷 저널리즘의 문제가 더 심각해 보인다. 사건의 발단이 된 악플에 대한 진위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운데, 진원지인 증권가 찌라시가 단죄를 받는 상황이다.

▲ 고 최진실 씨 영결식 ⓒ연합뉴스
 17년 전 가을, 나는 <인간시대> PD로서 최진실의 인간적인 면모와 체취를 담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장차 성숙한 연기자로서 오래오래 우리에게 남아 있기를 충심으로 소망했다.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함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가끔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심신이 피곤해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출연자의 ‘무장해제’를 바라는 <인간시대>에게는 그것이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장 카메라 앞에 익숙한 연기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곤 했다.

 최진실은 이후에도 오랜 세월을 아마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다. 강한 모습으로 무장해야만 하고, 남보다 약해 보이면 우스운 꼴을 당하는 정글의 한국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억세게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관리하고, 또 강인하게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2008년 가을날의 신새벽에 그녀가 내린 결정은 그것이 한계에 부닥쳤을 때 내린 최후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떼같은 어린 두 아이를 두면서까지 내려야 했던 그 행동에 결코 동의할 수 없고, 그 진실 또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죽음에 일말의 책무를 느끼며 진심으로 그녀의 명복을 빈다.

 문득 시인 존 단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시귀가 생각이 난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한다. 왜냐햐면 내가 인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저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하지 말라. 종은 그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부연하면 이 종은 한국 사회에 울리는 경종(警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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