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방송은 청취자 없는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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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방송은 청취자 없는 방송
[옛날TV 다시보기(1)] 이정호 대중문화평론가
  • 이정호 대중문화비평가
  • 승인 2008.11.12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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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방송은 냉전 전파전의 병기였다.

박용규 상지대교수 등이 지난해 말 펴낸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는 이 시기를 ‘반공 거구기 라디오 - 청취자 없는 방송’이라고 지적했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가 쓴 <아나운서 임택근>도 관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1951년 부산으로 옮긴 방송국은 전황보도에 집중했다. 미군이 수신한 외신을 번역해 한국 아나운서가 읽었다. 정부는 서울 탈환 뒤 공보처에 방송관리국을 신설했다. 그러나 KBS는 청취자 대중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했다. 당시 방송작가 백야는 1954년 12월 3일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공보처 직속기관인 서울 방송국에 대해서는 국민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썼다.

▲ <월간방송> 1958년 4월호.

1957년 4월 18일 여든 두 살의 늙은 대통령 생일잔치는 당시 공보처와 KBS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 탄신 82회 경축행사’란 이름으로 벌어졌다. 당시 방송에는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대통령 내외 뒤로 늘어선 자유당 간부, 사법부 수장들, 군 수뇌부, 주한 외국사절단 등 방문객을 소개했다. 서울 곳곳에서 행사가 이어졌다. 의장대 경축 분열식에, 비행편대의 축하비행, 유도 검도 등 경축 무술대회, 경축 마라톤대회, 농악 행렬, 창경원과 덕수궁의 악단 공연, 시립극장에서의 연극에 이어 밤에는 주한 외국인을 위한 ‘한국의 밤’까지 곁들여져 경축일 수준이었다. 이 모든 걸 KBS가 방송했다. 2주에 한 번씩 라디오에 잠깐 이명박 대통령을 소개해야 하는 지금의 청와대 측근들은 그 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15 부정선거 직전 일본에서 6TR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직수입해 농어촌 가정에 무상으로 배포, 전기가 없는 농어촌에서도 소량의 건전지로 라디오를 듣게 했다. 이승만의 치적, 정부 정책 선전이 주목적이었고 미 공보국의 냉전 심리전과도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국영 KBS의 직원들은 공무원 신분이었고, 보도는 항상 공보처 지침을 따랐다. 방송 기자들도 공무원으로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걸 뉴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과는 정반대의 논리지만 학자들은 방송의 국가소유가 KBS의 왜곡, 편향을 불러오고 방송 발전을 막는 주원인이라며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국영 KBS 라디오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시기였다. 부산MBC는 60년 봄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현장에서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올 봄 인터넷 매체들의 촛불집회 생중계의 원조다. 기독교방송도 최선을 다해 시위를 다뤘다. 그러나 KBS는 대통령 하야 전까지 시위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 이정호 대중문화비평가

프랑스 1TV가 1968년 혁명에 눈 감은 것과 똑같았다. 동아일보는 1960년 4월 28일자 <‘거구기’는 그만>이란 칼럼으로 KBS의 왜곡보도를 질타했다. 40년 전 농어촌에 라디오를 나눠 줬듯이 몇 년 뒤 아날로그 정파에 맞춰 생활보호대상자와 차상위계층에게도 수상기 무상 지원 등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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