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스와 매운 맛’에 빠졌던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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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MBC 특별기획 ‘스파이스 루트’

쇠고기 정국, 촛불의 난 등으로 시끌시끌하던 2008년 여름. 나는 그 혼돈의 시기에 태풍의 눈으로부터 벗어나 외국을 떠돌고 있었다. ‘식문화탐사 특별기획’이라는 다소 거창한 기획의도의 다큐멘터리, ‘스파이스 루트(SPICE ROUTE)’ 촬영에 조연출로 합류했기 때문. ‘스파이스 루트’란 동남아에서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향신료가 전파되었던 해상 무역로를 뜻한다.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땐 전혀 들어본 적 없었던 말이었다. 길이라곤 실크로드 밖에 몰랐던 무식을 탓하려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 ‘그렇다면 나에게도 해외출장의 나날이 시작되려나?’

▲ 스파이스 루트 ⓒMBC
그렇게 첫 출장을 떠날 때만 해도 인도네시아, 태국, 헝가리,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멕시코, 인도 촬영 등 세계 일주에 가까운 스케줄로 선후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식신 원정대니, 귀족 조연출이니’ 하는 뒷담화(?)가 끊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각국의 스파이스 음식들이 벌이는 ‘맛의 향연’을 찍다보면 떡고물도 떨어지리라는 기대까지. 하지만 출장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비상사태 때문에 출발 전의 기대와 뒤숭숭한 한국의 일들은 금세 뇌리에서 사라지고 ‘어떻게 버틸 것인가’ 한 가지 절박함만이 남고 말았다.

첫 사건은 동남아에서 벌어졌다. 박물관 촬영을 갔다가 잠깐 벗어놓은 가방을 도둑맞았던 것! 가방 속엔 각종 기념품과 함께 서브로 가져갔던 A-1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다. 예전엔 ENG 카메라를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해외출장엔 이런 일이 다반사’라는 말에 안정을 찾았지만, 문제는 가장 중요한 그날의 촬영 테이프까지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빡빡한 스케줄에 재촬영은 힘들었고 결국 그 부분은 다른 나라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 스파이스 루트 ⓒMBC
두 번째 출장지는 유럽이었다. 물가 비싼 거 말고는 큰 문제 있을까 했던 것은 순진한 생각. 스페인에서 출발해 이탈리아를 거쳐 헝가리에 도착했을 때, 여섯 개의 짐 중 4개가 도착하지 않은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그 속에는 개인 짐 뿐 아니라 트라이포드 등 장비들까지 있었는데 이베리아 항공기를 타고 알리딸리아와 말레브(헝가리 항공사)가 공동 운행하는 항공기로 갈아탔더니 어느 곳에서도 책임지고 찾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 기다려라, 우리는 모른다 등의 무책임한 말에 질린 우리는 온갖 수모를 받으며 헝가리, 이탈리아의 공항 창고를 샅샅이 뒤져 닷 새 만에 4개 중 3개의 짐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트라이포드는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우리에게 돌아왔다.

▲ 김동희 MBC PD
몸 아프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선 응급실 신세까지 져야했다. 갑작스런 오한에 감기라고만 생각했으나 급성 신장염. 시차가 뒤바뀐 생활과 잦은 이동이 원인이었다. 간단한 검사들을 마치고 받아본 청구서는 무려 7200 달러. 7200 달러면 지금 환율로 무려 1000만원에 가까운 돈. 결석이 우려된다며 찍은 CT와 피검사 비용으로는 턱없이 비싼 아니 어지간한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의 악몽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 직장 생활 3년 동안 모아놓은 돈 하룻밤에 다 날릴 뻔 했던(결국 여행자 보험 등으로 보전 받았지만) 지옥의 밤이었다.

총 24 번의 비행 스케줄, 8개국, 해외촬영 3개월. 순진한 조연출의 해외출장 판타지를 무참히 짓밟은 ‘스파이스 루트’ 가 살인적 촬영일정을 마치고 11월 23일 첫 방송된다. 도둑맞고, 병나고, 짐 잃어버리고, 촬영지에서 테러나고….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만 드디어 방송은 나간다! HD ENG 와 최고의 앵글(?)을 고집했기에 더 힘든 작업이었지만 ‘스파이스와 매운 맛’에 빠져있던 6개월은 참으로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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