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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영화 ‘시네마천국’을 아는가? 그렇다면, 영사기사인 알프레도와 우정을 나누며 영화라는 바다에 흠뻑 빠져 지내던 어린 토토의 모습도 생각날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 춘천의 영화관에서 매점을 운영하던 부모님 덕에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방의 작은 극장은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삶의 한 때였다. 상영되는 모든 영화를 섭렵하고, 영사실에서 잘린 필름을 가지고 놀았다. ‘하춘하쇼’와 ‘서영춘쇼’ 그리고 서커스 공연을 보면서 배우와 곡예사가 되는 꿈을 꾸었고, 낭만 거지가 되겠다는 바람을 품기도 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소년 앞에 펼쳐진 현실은 어린 시절의 꿈처럼 달콤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현실이란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우연히 라디오 구성작가로 방송 일을 시작했다. 이후 라디오 DJ와 TV리포터, 그리고 계약직 연출자도 해봤다.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드라마타이즈로 제작되는 오락프로그램, 그리고 ‘카메라출동’과 같은 보도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송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나’란 존재는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방송을 시작한지 10년쯤 되었을 때 어떤 욕구가 밀려왔다. 시간에 쫒기지 않고, PD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었다. 살던 자취방의 보증금을 빼고 모든 돈을 털어 다큐멘터리 제작비를 마련했다. 인도로 갔다. 꿈이라는 열정과, 현실이라는 냉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열정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현장에 녹아들기 전까진 절대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말자.” 다른 이의 문화와 삶을 타자가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자료조사 한 것의 몇 개를 가지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난센스다. 촬영대상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공기의 흐름조차 다큐멘터리 촬영에 영향을 미친다.

배낭여행자들과 어울려 2달러짜리 방에서 잠을 자고, 현지어를 배우며 촬영대상자들과 똑같은 밥을 먹었다. 그렇게 해서 1년 6개월 동안 방랑하며, 다큐멘터리 “보이지 않는 전쟁-인디아 리포트”(2000년)를 제작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 겪는 비극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몇몇 영화제를 통해 상영을 했고, 상이란 것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인도전문가’란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인도관련 기사를 종이매체에 쓰기 시작했고, 인도인의 삶을 다룬 상당수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쯤 되다보니 여의도에서 나름 성공한 외주제작PD로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한다. 딱 거기까지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집에 들고 간 돈은, 단 한 푼도 없다. 오히려 아내의 돈을 가져다 썼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이건 사실이다. 그래도 행복했다. 아내 역시 늘 든든한 후원자로서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일원이었다. 일부 후배들에겐 질타도 받는다. “선배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식의 희생을 강요당하잖아요.” 

외주제작 현장에서 40대의 현업PD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미국의 선덴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본선에 오른 <워낭소리>의 연출자 이충렬PD의 삶을 엿보면 그저 눈물겹다. 그나마 그는 아직 미혼이다. 한중일PD 포럼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는 <신의 아이들>의 연출자 이승준PD의 가족은 여전히 희생을 강요당한다. <인간의 땅>에 연출 생명을 걸고 2년이 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강경란·박봉남PD는 말할 것도 없다.    

▲ 이성규 독립PD

KBS의 이병순 사장 체제는 지금보다 더 높은 강도의 희생을 제작사에 강요하고 있다. 이미 바닥이었던 외주제작비였는데 거기서 더 삭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협찬금의 50%를 요구하며, 우리로 하여금 앵벌이로 나설 것을 강요한다. 외주제작 PD로서 ‘부’를 누리는 건 꿈도 꾸지 않는다. 안정적인 수입으로 그럴듯한 가족생계를 하는 것 역시 꿈도 꾸지 않는다. PD의 자존심을 아는가? 그 자존심의 마지막선이 지금 무너지려한다. 이미 정규직의 노예였지만, 그나마 사슬 없던 노예들에게 이병순 사장 체제는 쇠사슬로 묶어 채찍을 휘두르려 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숱한 외주제작 PD들이 방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방황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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