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빚을 갚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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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빚을 갚자
[이채훈PD의 터닝포인트]
  • 이채훈 MBC PD
  • 승인 2009.01.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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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MBC PD

재벌과 극우신문의 방송진출을 막기 위한 파업, 그 첫 단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돌발 상황이 없는 한 막무가내 직권상정과 날치기 통과를 일단 막아낸 것으로 보여 다행스럽다. 추위 따위 아랑곳없이 뜨겁게 투쟁한 언론노조 동지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2월, 4월, 8월까지 이어질 싸움은 더욱 험난할 게 예상된다. 그러나 이제는 촛불 국민이 함께 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온 국민의 저항이다. “밥그릇 챙기기”라고 매도할 테면 매도하라. 우리는 그들처럼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좋은 방송을 위해 노력한다’는 자부심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힘내라 MBC>(http://cafe.daum.net/saveourmbc)에서 MBC노조 20년사 동영상을 보았다. 많은 얼굴들이 보였다. 젊고 해맑은 옛 조합원들의 얼굴. 회사 곳곳에서 여전히 현업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 대학교수, 지방사 사장, 정치인 등등 새로운 길을 찾아 제몫을 다하고 있는 선배 동료들이 반가웠다. 모두 우리 사회, 한 배를 타고 있다. 

파업 집회에 앞장섰던 어떤 이는 어느새 수구정당 국회의원으로 변신, ‘언론 탄압의 전위대’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다. 세월을 생각한다. 세월이 흐를 때 변하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노조원 1호’임을 자랑스레 여긴다는 윤도한 기자의 귀여운 동안(童顔)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노조의 본령이 복지보다 공정방송에 있다”는 점도 변하지 않았다.

▲ 지난달 30일 전국언론노조 총파업 2차 결의대회에는 4000여명의 조합원이 모여 '언론장악 저지'를 외쳤다. ⓒPD저널
20년 전을 되돌아본다. 당시 우리의 구호는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였다. 6월 항쟁이 만들어낸 민주화의 흐름에 무임승차한 자괴감이 있었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오랜 세월 꽤 열심히 투쟁했고, 그 결과 방송의 자유는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그런데 집권세력은 거꾸로 ‘국민의 방송’을 재벌과 조중동의 손에 넘겨주겠다며 속도전을 다그치고 있다. 

‘공정방송’이란 단어는 입장에 따라 뜻이 다르기 때문에 이제는 다소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모두 자기 입장이 ‘국민의 뜻’이라고 우기고 자기 맘에 드는 게 ‘공정하다’고 목청을 높이는 혼탁한 싸움판이니까. 분명한 건 권력과 재벌을 감시해야 할 방송이 그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 위주로 방송한다면 그건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굳이 논증이 필요할까?
 
지난 10년간 우리는 완벽한 언론 자유를 누려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수구 집단의 ‘공정방송’ 담론을 효과적으로 논박하지 못한 것, 지나친 시청률 경쟁으로 방송 사영화의 빌미를 준 것, 인적 청산이 미흡하여 KBS 이병순 체제와 YTN 낙하산 사장 - 이 사람이 MBC 출신이라는 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 - 을 미리 막지 못한 것, 이른바 ‘생존’ 논리에 매몰되어 방송통신위와 방통심의위에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인 것 등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은 우리의 업보라 아니할 수 없다. 국민들이 우리에게 쥐어 준 완벽한 언론자유를 갖고 해낸 게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내내 수구신문들은 청와대와 멱살잡이를 하며 청.와.대.와. 맞.먹.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데 말이다.     

▲ KBS 노조가 언론노조 총파업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 김덕재 PD협회장을 비롯한 일부 KBS 기자와 PD들은 '총파업 2차 결의대회'에 참가해 조합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PD저널

하지만 변하지 않는 우리의 진정성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연말, 매서운 추위 속에서 거리 홍보에 나선 MBC 후배 노조원들의 해맑은 얼굴에서 20년 전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작년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던 KBS 노조 또한 의연히 살아 있음을 보여 줄 예정이라고 한다. 90년 4월, KBS 민주광장에서 함께 타올랐던 KBS인들의 뜨거운 숨결이 그립다. 

추위는 새해에도 여전하다. 이 엄혹한 반동의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우리가 외쳐 온 ‘공정방송’의 진정성은 올해 여하히 투쟁하느냐에 따라 적나라하게 평가될 것이다. 이는 뒤집어 보면 6월항쟁에 무임승차한 빚을 완전히 갚을 기회가 20년 만에 비로소 찾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투쟁, 그 중심에 설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온 국민이 무장해제된 채 파렴치한 집권세력에게 유린당하는 지금, 우리의 어깨가 새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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