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민주광장에서 자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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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민주광장에서 자수했습니다”
[경계에서] 이성규 독립PD
  • 이성규 독립PD
  • 승인 2009.01.1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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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8일, KBS 민주광장에서 저는 자백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징계에 분노하는 첫 집회가 열리는 자리였습니다. 독립PD도 그냥 있을 수 없어 성명서를 들고 무작정 찾아 갔습니다. 얼떨결에 불려 나갔습니다. 독립PD협회장인 최영기PD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저에게 마이크가 넘어오면 독립PD협회의 성명서를 낭독할 생각이었습니다. 마이크가 왔습니다. 아주 잠깐 머뭇거렸습니다. 입을 열었습니다. 제 입에서는 성명서 낭독 대신, 무덤까지 안고 가야했던 범죄에 대한 자백이 튀어나왔습니다.

KBS는 제게 친정과 같은 곳입니다. FD, 카메라보조, 녹음기사, 라디오 및 TV 리포터, 작가 그리고 계약직 조연출로 사실상의 PD 등, 온갖 방송 일을 배운 곳이 KBS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몇몇 간부들의 수금원이었습니다. 정규직 PD에게 시킬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그들은 저 같은 노비(?)를 활용했습니다. 저는 봉투를 받아왔고,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봉투 가운데 일부는 제 술값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때 그걸 거부하지 못했나' 하는 극단적인 자괴감에 빠져 자해를 하는 지경에 이르곤 합니다. 30대의 기억에 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 KBS PD협회 소속 200여명의 PD들이 18일 오후 4시 'KBS 파면사태'에 대해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PD저널

도덕적 해이에 빠졌던 그 당시, 저는 방송에서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순전히 제 잘못이었지요. 자숙하는 심정으로 KBS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KBS에서 그들이 저를 다시 불러 주더군요. 고마운 마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때가 1997년입니다. KBS노조가 파업을 하자, 대체인력으로 들어간 거였지요. 저는 그들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KBS의 양식 있는 몇몇 선배PD와 조우하면서, 제 굴종의 삶은 종식됩니다. 선배PD들의 배려와 성원으로 다큐멘터리를 하게 됐고, 방송인의 도덕과 양심 그리고 철학을 배우게 됩니다. ‘수요기획’을 거쳐 KBS의 자존심이라는 ‘KBS스페셜’까지 하게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함께 2년 전에 제작 연출했던, <천상고원 무스탕>이란 다큐멘터리는 ‘MBC스페셜’에 방영되기도 했죠. 이밖에 제작을 맡았던 <신의 아이들>의 경우엔 전주국제영화제와 한중일PD포럼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쉬었습니다. 오지에서의 오랜 촬영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슬렀지요. 사실 상당 기간은 싸움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싸움의 대부분은 공영방송의 기능을 빼앗겨가던 KBS를 향한 거였지요. 그것은 저의 양심과 철학이었습니다.

21년 동안 외주제작 PD로 방송을 하면서, 지금처럼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 본적이 없습니다. 소속은 다르지만 KBS의 양승동 PD는 저에게 있어 방송인의 양심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 준 선배입니다. 그의 파면은 철회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승동PD 파면에 참여했던 이들의 일부는 저의 30대를 쥐고 흔들었던,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백을 하고 부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무덤 속 까지 들고 가려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그걸 고백했으니까요.

▲ 이성규 독립PD
“난 행복해. 생각해봐. 세상에 나처럼 이렇게 운 좋은 놈이 어디 있어. <KBS스페셜>을 했어. 그리고 이어서 <MBC스페셜>을 했어. 이젠 <SBS스페셜>을 기획 중이야. 말해봐! 누가 지상파 3사의 다큐멘터리 스페셜을 모두 해봤는지. 근데 날 보고 방송 노조의 노예라고 말해? 내가 노예였던 때는 말이지. 검은 돈의 수금원이었고 대체인력이었던 30대였어.”

여전히 저에겐 상처받은 30대의 트라우마로 가득합니다. 몸 사리지 않았던 촬영으로 입은 부상들, 하지만 그 어떤 보상도 없었던 상흔들. 그리고 노예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 했던 자해. 그 모든 게 21년 째 외주제작현장을 버티어 온, 마흔일곱 살 독립PD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후배 독립PD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싸우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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