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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원래도 나는 눈물이 많은데, 마흔 줄이 넘으면서 원래도 많던 눈물이 더 늘었다. 토요일에는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를 보면서도 울었고, 지난주에는 일본 영화 〈스윙 걸스〉를 보면서 아예 울음보가 터졌었다. 명박 시대를 살면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감성은 풍부해져서 좋은 것 같다. 근래에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울지 않았던 것은 〈적벽대전 2〉와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다찌마와 리〉는 웃다가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 같은 B급 감성의 소유자에게도 유머의 단수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마음껏 웃기에는 좀 무리였던 듯싶다.

어린이용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되었던 최호철의 5권짜리 전태일 얘기인 만화 〈태일이〉는 신빈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근의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 인턴, 그리고 신규 취업자 월급 삭감 등의 얘기와 겹쳐지면서 간만에 실컷 울었다. 최호철의 전작 〈을지로 순환선〉을 읽을 때에는 눈물은 나지 않았고, 왠지 먼 곳을 여행한 듯한 느낌과 함께 앞으로 닥쳐올 서울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아주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그 속에서 잊혔던 존재인 노동자 특히 여공의 인권 문제를 맨 앞에 가지고 왔던, 그래서 한 때는 예수와 같은 예언자의 반열에 비교되기도 했던 전태일 얘기가 2009년이라는 이 공간에서 더욱 각별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빈곤이라는 문제가 다시 돌아오고 있고, 40대-50대 남자들과 아파트 거주민은 과잉 대표되어있는 반면, 그 외의 카테고리에 사는 사람들은 과소대표 되어있다.

전태일이 분신하던 그날의 사장들의 모습과 지금 알바 고용인들의 모습은 다를 게 하나도 없고, 근로기준법을 태우면서 자신의 몸도 같이 태우던 그날의 모습과 오늘의 비정규직보호법이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사람 사는 데에 어찌 모든 것이 다 편하고, 불만이 없겠는가만은, 그 때의 노동부와 시청, 그리고 그 때의 경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또 역시 판박이이다. 만약 노조도 존재하지 않던 당시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기 위한 전태일의 희생이 지금 또 필요할까? 만약 알바 중에 누군가가 그 때처럼 ‘바보회’를 만들어서 집단행동을 한다고 하면 역시 청계천과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 만화 <태일이> (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 돌베개, 2007~2009)
최호철의 만화 〈태일이〉에는 ‘벽’이라는 상징으로 사회적 구조가 묘사되어 있다. 이 벽은 존재론적인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식론적인 벽이기도 하다. 개인 혼자서는 이 벽을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동시에 고립된 개인은 이 벽의 모습과 형태를, 심지어는 벽의 존재마저도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지금 한국의 많은 20대에게 그렇고, 여성들에게 그렇고, 지방거주민들에게 경제는 그 자체로 벽이기도 하고, 왜 자신들의 삶이 지금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삶이 이렇게 빡빡한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쩔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을 우리는 ‘경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국형 신자유주의, 즉 토건적 왜곡과 시장근본주의가 이상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것, 그게 바로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벽이 아닌가 한다.

이 시기에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방송은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전태일의 등장과 분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언론은 방관자이며 동시에 방기자이기도 했다. 지금 한국의 구조는 그 때와 대단히 유사하게, 그날의 경찰과 그날의 공장장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 지휘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하루하루 살아가는 비정규직과 경제활동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조여 오는 순간이다.

그 때와 달리 지금은 민주화되지 않았는가? 경제적인 눈, 정확히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경제적 삶에서 도대체 무엇이 민주화되었는지, 사실 나는 도통 모르겠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 삶을 생각한다면, 역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배고프고, 주거권 확보가 어렵고, 보건권 확보가 어렵다. 다만 그 때의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고 싶어했던 그 시기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바뀌거나, 청년 인턴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알바로 바뀐, 그 이름만이 다를 뿐 경제적 상황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 서러운 사람들에게 방송이 힘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그 때에도 사장과 경찰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언론의 그 비겁함을 오늘날에 다시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제발 “너만 잘하면 희망이 있다”느니, 모든 것은 “너 하기 나름이다”라는, 당시의 한국 지배층이 전태일에게 하던 말을 지금의 방송이 다시 반복해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벽 바깥에서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들’ 아니면 ‘고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바라보지 말고, 벽 바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속으로 더 들어가면 좋겠다. 그래야 희망이 생길 것 아닌가? 희망의 집단 최면 대신, 희망을 향한 집단 진화,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전태일을 다시 읽는 이유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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