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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1TV <역사추적> / 20일 오후 11시 30분

■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 연출 : 김형운, 나원식 PD
■ 글 : 지현주 작가

▲ <역사추적> ⓒKBS
800년 전 오키나와는 선사시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키나와는 일순간 눈부신 문명의 꽃을 피운다. 그것은 누구의 힘으로 가능했는가. 우리와 별 상관없는 일본의 역사인 줄만 알았던 세계 역사의 미스테리, 오키나와 문명 그 미스테리의 단서에 고려의 정예 군사, 몽골과 고려의 진압군에 의해 전멸한 줄만 알았던 삼별초가 있었다.

고려사의 실종자, 삼별초의 귀환

1231년. 몽고가 고려를 쳐들어왔고, 고려는 항몽시대라는 길고 어두운 시기를 맞는다. 고려는 40년을 버텼지만 세계를 정복해 나가던 칭기즈칸의 몽고를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고려정부가 결국 몽고에 항복하자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도에서, 항몽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결국 패하고 말았고 삼별초는 전멸,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때가 1273년이다. 그런데 2007년, 탐라와 류큐왕국 행사를 위해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역사에서 사라진 삼별초가 귀환했다. 바로 오키나와 지역에서 출토된 류큐왕국의 유물로 전시된 몇 점의 유물에서 발견된 단서를 통해서.

삼별초와 오키나와를 잇는 단서

전시된 유물 중에서 오키나와 기와는 제주도에서 발견된 기와보다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와 더 흡사했다. 뾰족한 꽃잎과 중앙의 자방이 오키나와의 수막새와 판에 박은 듯했다. 그리고 사다리꼴 모양의 우라소에에서 출토된 기와 한 점. 이 암키와에는 [癸酉年高麗瓦匠造;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계유년’이라는 또 하나의 단서다. 삼별초가 진압된 해가 1273년. 이 기와에 새겨진 계유년이다. 계유년이라는 교집합. 그 시기는 신석기 시대를 살던 오키나와에 문명이 일어난 때이다. 그렇다면 그 문명은 삼별초가 세운 것은 아닐까?

오키나와의 재발견, 그곳에 고려가 있었다

일본 규슈 남서쪽에서 타이완에 이르는 방대한 1200km의 열도 가운데에 있는 섬, 오키나와. 오키나와의 역사는 독특하다. 우리에겐 그저 일본의 한 섬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엄연한 독립 국가로 존재했다. 일본에 편입된 건 19세기나 되어서다.

그런데 1982년, 수리성 발굴조사에서 대량의 고려기와들이 출토됐다.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될 만큼 똑같이 생겼다. 기와에서는 어골문이 나타나는데, 어골문은 고려기와의 대표적인 무늬이다.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간 이유는?

삼별초는 왜 일본 본토로 가지 않았을까? 왜 선사시대 오키나와로 갔을까. 왜 삼별초는 일본으로 가 그들과 힘을 합치지 않았을까. 사실 1271년 진도 삼별초 정부는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 마지막 결전을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기존의 고려 정부가 아닌 삼별초 정부의 외교문서를 이해하지 못했고 삼별초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별초는 제주도로 후퇴했고 2년 뒤, 여몽연합군과의 최후의 접전을 벌이지만 패한다. 지휘관 김통정은 자결했고, 1300명의 전사는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땅 오키나와로 갔다. 고려를 떠난 삼별초는 류큐 왕국에서 새로운 터전을 꾸리고 발전시켜 나아갔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오키나와의 끈질긴 독립 요구. 그 독자성엔 몽고에 끊임없이 항쟁하며 자주 국가를 원했던 삼별초의 정신의 오래된 역사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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