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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따져보기] 조지영 TV평론가

〈카인과 아벨〉에서 이선우(신현준)는 동생 이초인(소지섭)을 죽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기억을 잃었던 초인을 중국에 버려두고 왔고, 초인이 끝내 살아 돌아오자 살인 청부업자에게 살인을 지시했고, 그마저 실패하자 탈북 테러리스트에게 또 살인을 사주했다. 무시무시한 살의의 이유라는 것이 결국 ‘애정 결핍’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초인, 자기 연인의 마음까지 가져간 동생이 미워서 죽이려고 했다.

〈아내의 유혹〉이 배출한 당대 최고의 악녀 신애리(김서형)의 경우는 어떤가? 마찬가지로 애정 결핍 환자였던 그녀의 악행 역시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갈취, 협박, 공갈, 살인교사까지 애리의 악행은 비난과 시청률의 견인차였다. 그런 신애리가, 얼마 전부터 시한부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카인과 아벨〉의 선우는 애리와는 다르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아팠던 사람이기 때문에 갑자기 아픈 애리랑은 차별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병증(病症)은 혹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는 아닐까?

▲ SBS 드라마 〈카인과 아벨〉
드라마 속 악인들은 꿋꿋이 악행을 거듭하고, 시청자들은 그 악행의 끝이 어떨지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채널을 고정한다. 마침내 마지막회에 이르면, 난데없이 이들이 눈물을 쏟아낸다. 사실은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며, 사실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며, 다 사랑해서 그런 거라며 눈물을 쏟아낸다. 그들이 대화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낼 때마다 화면에는 서글픈 발라드 음악이 차고 넘친다. 슬픔과 후회가 무르익으면 이제 남는 것은 대화해의 결말이다.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냐는 대사는 이 무렵 빠짐없이 등장하곤 한다. 죽도록 악인에게 당하기만 했던 주인공은 용서의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용서하지 않으면 드라마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악인이 죽든 살든, 주인공은 반드시 그들을 용서해야만 한다.

용서가 나쁜 것이 아니고, 반성과 회개가 나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악행-발각-회개-용서-1년 후 이런 식의 전개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 있어서의 적절한 균형이고, 개연성이다. 가령, 20부작 드라마라면 18~19부까지 줄줄이 악행만 이어지다가 마지막회에 이르러 회개와 용서가 자리 잡고 있다. 몇 개월째 나쁜 짓만 해왔던 신애리는, 종영을 일주일 앞두고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난데없이 죽을 날을 받아든 그녀에게 구은재(장서희)는 갑자기 베스트 프렌드를 자처하고, 당장 신애리를 감방에 처넣을 기세였던 정교빈(변우민)은 그녀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애리를 저렇게 만든 것은 다 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애리의 물건을 다 갖다 버리라던 교빈이, ‘세 번이나 결혼을 해봤으니, 이제 네 번째 결혼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며 자신감 100배였던 교빈이 갑자기 순교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마지막회에 이르러, 애리와 교빈이 자살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체 어딘가에 태엽 장치가 있는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인물이 이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앞으로 가라면 가고, 울라면 울고 죽으라면 죽는 것은, 움직이는 인형이지 인물이 아니다. 드라마란 인형이 아니라, 인물이 숨 쉬고 관계 맺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을 비춰야 할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 인지상정에 기대는 것도 한 두 번이다. 뜬금없이 남발되는 시한부 인생 레퍼토리에 시청자들은 지쳐간다. 안 그래도 아픈 일이 많은 세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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