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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방송 다시보기(23)]

70-80년대 한국 언론의 사회면엔 하루가 멀다하고 가짜 참기름, 가짜 고추장, 가짜 고춧가루, 가자 간장 등 식품안전성을 고발하는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85년 불량 간장에 대한 심층보도를 처음 한 곳은 MBC였다. 지금 MBC의 대표적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PD수첩>이지만 당시엔 <MBC 리포트>가 있었다. MBC는 보기 좋게 저질 간장을 탐사보도해 당시 보건사회부와 업자,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취재의 단초는 작은데서 출발했다. 보통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통에 든 간장 값이 “인천에서 퍼 오는 바닷물 값보다도 싸다”는 희한한 얘기를 듣고 취재에 들어갔다. 간장의 제조공정은 끔찍하게 지저분한 환경에서 무허가로 생산되고 있었다. 제조 과정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데다가 믿었든 큰 업체에서 만든 간장도 대부분 화학간장이었음이 밝혀져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에 온 매스컴과 소비자 보호단체가 떠들썩한 반응을 보였다.

MBC의 특종 이후 여러 신문과 방송이 앞 다투어 간장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간장 제조업자와 여성단체 사람들이 모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된 대담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고발 프로그램의 본디 기능을 잘 살린 첫 보도가 나간 뒤 경쟁하듯이 제작된 그 많은 간장 문제를 다룬 보도들은 점점 더 업자들만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정성을 잃고 과도하게 몰아붙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식품, 특히 농산물을 1차 가공하는 식품의 유통시장의 근본문제를 캐지도 않고 일부 업자들의 악덕 상술로만 치부하고 마구 두들기기만 한다. 그런 다음엔 1-2주일 뒤 싹 씻은 듯이 잊어버리는 보도태도가 반복됐다. 또 다른 식품이 문제가 되면 다시 그 식품만 집중 공략하다가 역시 1-2주뒤 그치는 소나기 보도를 반복했다.

당시 방송은 간장에 관한 더 자극적인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콩을 한해 동안 걸쳐 띄웠다가 장을 담근다는 일본의 ‘기꼬망’ 간장 공장의 제조과정을 현지 특파원을 동원해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보도의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약간의 균형감각만 잃으면 이런 역풍은 어김없이 파고든다. 방송이 나간 뒤 기꼬망 간장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맹목적으로 시청자의 기분을 맞추려는 보도태도는 무슨 일이 터지면 쉽게 선진국의 사례부터 챙기고 보는 오랜 습관 때문이다. 기꼬망 간장은 느닷없이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매점매석이 번져 엉뚱하게 값이 치솟았다. 미국이나 일본의 대규모 회사들이 해외 진출 직전이면 으레 그럴듯한 연구기관을 동원해 먼저 상륙할 나라의 제품을 풍비박산 내고 시작하는 것처럼 한국의 모든 간장업자가 도매급으로 매도당했다.

▲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방송은 화면의 시각적 사실성 때문에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에게 보도 내용을 알릴 뿐만 아니라 화면이 지닌 구체성은 그 파괴력이 신문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방송 현업자들은 이런 파괴력을 스스로 통제할 자기 중심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언제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 극단적인 보도를 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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