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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의 영화이야기] 영화 ‘빌리 엘리어트’

영화를 보다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짠해지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만듦새와 상관없이 어떤 장면이 나오면 마음 속 특정 부위가 부풀어 오르면서 울컥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견고하게 닫혀있던 인물의 마음속 빗장이 열리고 연약한 속내가 드러날 때가 내게는 그런 순간인데 때로는 그런 장면 때문에 그저 그렇던 영화가 쑥 마음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고 또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내 인생의 영화로 남게 되기도 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는 영국의 탄광촌에 살고 있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광부인 아빠와 형은 파업중이며 치매인 할머니를 보살피는 일은 어린 빌리 몫이다. 빌리는 완고한 아빠의 강요로 권투를 배우고 있지만 영 재능이 없는 반면 같은 체육관에서 수업하는 발레에는 저절로 눈길이 가게 되고 결국 선생님 윌킨슨 부인의 권유로 아빠 몰래 발레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보수적인 아빠는 아들이 발레를 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탄광의 파업으로 정신이 없는 형도 빌리를 이해해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파업으로 팍팍한 현실은 어린 빌리에게도 무거운 짐일 뿐인데 그때 단 한사람. 빌리의 재능을 알아주고 빌리의 꿈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바로 윌킨슨 선생님이다.

▲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
교습비도 받지 않고 ‘로열 발레단’에 입학시험을 볼 수 있게 개인교습을 시켜주기로 한 윌킨슨 선생님은 어느날 춤을 추는데 영감을 주기 위해 빌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가져오라고 한다. 빌리가 체육관에 가져간 것은 축구공, “I love to boogie”가 녹음된 테이프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의 편지. 엄마는 18살이 되면 읽어 보라고 했지만 벌써 편지를 뜯어본 빌리는 모든 구절을 외우고 있다.

네가 자라고 웃고 울고 소리치는 것을 보진 못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거라는, 너의 엄마라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편지. 그리고 이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슴 아픈 장면. 선생님은 찬찬히 편지를 읽고 빌리는 한 구절씩 따라서 외운다. 햇살이 부서지는 조용한 체육관에서 편지를 읽으며 빌리의 마음까지 읽는 윌킨슨 선생님.

그 후 “I love to boogie”에 맞춰 함께 즐겁게 춤을 추는 윌킨슨 선생님과 빌리는 내가 본 그 어떤 사제지간보다 아름다운 관계였다.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연주(거문고를 타는 마음)를 알아주는 종자기가 죽자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해서 음을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의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지만 춤을 추고 싶은 마음,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빌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윌킨슨 부인이야말로 빌리의 진정한 친구이자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도 많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 초등학교 5, 6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양호선생님,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 그리고 자주 연락드리고 있는 내 인생의 선생님까지 5월 이즈음이 되면 많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만이 선생님인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곳곳에서 가르침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접하게 된 깊이 있는 생각의 블로거, 책으로 가르침을 주는 존경스러운 인문학자, 그리고 가깝게는 현명하게 일하며 가정생활도 하고 자기계발에 열심인 직장의 선배들까지. 배울 점이 있는 롤모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도 행복한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배울 것이 새로 생기고 깨닫는 것이 늘어가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인가.

▲ MBC FM <이주연의 영화음악> 진행자, 이주연 아나운서
더군다나 의무교육 기관이 아닌 곳에서 내게 깨달음을 주는 그들은 나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두드리고 가슴을 열어주는 선생님들이다. 시험 보는데 필요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사랑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나눠주고 나의 꿈과 고민과 인생을 알아주는 사람들. 하여 그들 모두에게 외치고 싶은 말,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제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선배 혹은 선생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5월에 하는 마음 깊은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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