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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노무현이, 그 바보 노무현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삶의 비중 때문일까? 그가 바위에서 뛰어내린 순간부터 한국의 일정들은 잠시 멈추어 섰다. 물론 그 동안에도 박찬욱 감독의 칸 수상 소식이 전해졌고, 광주의 유니버시아드 결정이 있었고, 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세상은 잠시 정지한 듯이 멈추어 섰다. 노무현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주말, 많은 사람들이 일손을 놓았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때, 인간중심주의 철학이 유행을 했었고, 인본주의라고 번역되는 휴머니즘이 유행을 했다. 인간이 아무리 지구에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 선다고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것은 그러한 모순의 부조리의 한 가운데 있으며, 어떠한 죽음도 이성적이지 않다. 죽음은 이성의 너머에 존재하는 장치가 아닐까?

한참 비가 내리더니 마당에 조그맣게 심어놓은 고추에 꽃이 피었고, 감자들도 무릎까지 올라섰다. 노무현이 떠나간 일요일, 쭈그리고 앉아서 감자 줄기들을 보고 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무당벌레도 보았고, 그리고 사마귀도 보았다. 사마귀는 마침 이파리에 내려앉은 풀잠자리 한 마리를 사냥했는데, 사마귀 이름 그대로 ‘당랑권’을 한 번 보게 되었다. 먹이가 된 벌레는 한 번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사마귀의 앞발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런 것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오히려 서울 한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사마귀가 더 부자연스럽다고 할 것인가?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카스토리아디스의 불어본 ‘이매지너리’의 책표지에는 사마귀의 살벌한 모습이 실려있다. 카스토리아디스에게 사마귀는 죽음의 유혹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수컷 사마귀는 죽음을 불사하고 위험한 교미를 한다. 때때로 암컷은 교미 중인 수컷 사마귀의 머리부터 먹기도 한다는데, 내가 마당에서 본 유난히 작은 듯한 그 사미귀는 바로 그 위험한 유혹으로 생을 마감하는 바로 그 수컷 사마귀였다.

‘페스티발’이라는 단어는 죽음과 상당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의 모순을 사회 안에서 인위적으로 재생산시키는 것을 페스티발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왕이 죽고 다른 왕으로 승계되는 상황에서 페스티발이 벌어지는데, 전왕에 속했던 것이 새로운 왕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 과잉이 용인된다. 사회적 상상이 일종의 기구라면, 새로운 상상체가 등장하는 것은 합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이런 용인된 과잉을 통해서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7년 청와대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만찬회동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국가기록원
노무현의 죽음은 이런 ‘용인된 과잉’을 우연하게 열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회적 의미의 케이어스를 겪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무현은 적이 많았고, 친구가 아주 적었던 사람인 것 같다. 느닷없이 그가 바위에서 뛰어내린 후, 한국에는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축제나 성찰이나, 어쨌든 비일상적인 것들을 겪어야 하는 일종의 사회적 드라마인 ‘소셜 드라마’가 펼쳐진 셈이다. 이 힘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노무현을 추모하는 행렬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버스들이 사람들을 한 쪽으로 밀어내는 차벽도 만들어내었다. 일시적으로, 한국은 친노와 반노, 두 가지만 있는 것 같이 되었다.

이 사회적인 드라마가 과연 어디로 향할까? 그거야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바위에서 뛰어내린 노무현이 우리에게 문득 환기시켜준 것은, 지금 우리가 경찰국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지금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찰국가를 보면서 절감하게 된다. 노무현의 죽음은 지금 우리에게 그의 분향소를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과 함께, 하나의 사회적 실체가 된다. 민주주의? 어쩌면 지금 노무현의 분향소가 포위되어 있는 것처럼 한국 민주주의는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노무현의 통치도 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 같지만, 겨우 이렇게 죽기 위해서 한미 FTA를 그렇게 강행하고 비정규직 체계에 대해서 ‘시장’이라고 해야했을까? 어쩌랴! 죽은 자의 평온을 기원하며, 또 산 사람들이 살아갈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늘어선 경찰차와 경찰들. 그 본질을 단번에 드러낸 하나의 죽음, 세상은 아직 너무도 잔인하다.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도 늘어선 경찰들, 그렇다면 민초들의 죽음 앞에서는? KBS에는 없는 세상의 상징적 진실, 다시 한 번 그대로 드러나고, 나는 이 경찰국가의 현실은 “우리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KBS발 방송프로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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