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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진의 내키는대로 듣기]

▲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오랫동안 궁금한 게 있다. 왜 한국 남자들은 직업과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의 경력만 쌓이면 ‘꼰대’가 되는 걸까. 꼰대의 정의에 대해서 일단 내 생각은 이렇다: 1)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한다(<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세대라서 그런가). 2) 여차하면 나이가 등장한다(혹은 어느 새 반말이…). 3) ‘다르다’는 말보다 ‘틀렸다’는 말을 애용한다.

최근 전인권의 인터뷰가 잠깐 화제가 되었다. 무척 수척해진 사진에 깜짝 놀라 안쓰러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동정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아야 마땅할 사람이 온전히 대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픈 분노였다. 그런데 전인권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또 다른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정신세계가 없는 음악은 서커스”라는 제목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이 발언의 저변에는 ‘진짜와 가짜’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발언들은 윤도현이나 신해철, 혹은 최근에 새 앨범을 발표한 헤비메탈 그룹 백두산의 홍보 문구에도 등장한다. 윤도현은 라이브를 절대적인 기준처럼 얘기했고, 신해철은 댄스 가수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백두산의 경우엔 새 앨범의 홍보에 ‘형님들의 귀환’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진짜 가수가 없는 음악계를 한탄하고, 진정한 음악이 나오지 않는 시대를 개탄한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은 노래운동 진영이나 대학 운동권에서도 들을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삶과 노래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시대’를 격하게 논하는 이들은 신해철도, 윤도현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래서 누가 진짜 가수냐는 게 아니다. ‘진짜와 가짜’라는 게 어디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건 함정이다. 그걸 구분하기위한 절대적인 기준, 그러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기준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보다는 차라리 ‘영리하거나 멍청한’이란 기준이 더 합당하다. 적어도 전략에 대해서 말할 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진짜 vs 가짜’란 구도는 수용자들도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이를테면 ‘홍대 앞에는 진짜 음악이 있고 방송국에는 가짜 음악이 있다’거나 ‘누구누구는 진짜 가수고 누구누구는 가짜 가수다’라는 구분이 여전히 설득력을 가진다.

▲ YB밴드 ⓒ다음기획
음악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수시로 벌어지고 서로를 ‘까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을 제시하는 게 촌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수용자들은 아이돌 가수와 록 밴드의 음악을 동시에 소비하며 잘 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고고하게 꼰대 노릇을 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중한 목소리로 가르치려고 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너는 틀렸다’고 말한다. 과연 그들이야말로 우리 같은 하급자들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절대자로 거듭난 존재들이다.

나는 꼰대야말로 한국 사회를 좀먹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꼰대는 일종의 태도다. 그것이야말로 권위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임의적인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한 자가 당연히 권력을 가지는 걸 합리화하는 태도다. 그러니까 반-민주적이다. 좋은 세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우리는 대부분 ‘나는 꼰대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꼰대 노릇을 즐겨 하고 있다. ‘진짜 음악을 들려주마’로부터 ‘이 형이…’로 시작되는 문장을 구사하거나 혹은 모든 분쟁을 앞장서 ‘해결’하려거나, 타인의 삶에 기어코 끼어들어 참견하면서 우리는 꼰대로 살고 있다. 그걸 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성찰’부터 해야 한다. 내가 누군지 결정하는 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요 며칠 정신없었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토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접한 비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 문학계에서 유래 없이 ‘노동의 문제’에 집중해왔다고 평가받으며 차기 노벨문학상 수상자로까지 거론되던 황석영 작가가 뜬금없이 ‘한국 제국주의론’을 들고 나오기 무섭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감사 결과가 발표되며 황지우 총장이 사퇴를 하더니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비보까지 날아왔다.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믿고 있던 어떤 기준이 무너지는 기분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까지 부수고 싶어 했던 권위주의에 대해서 생각한다. 권위주의를 없애는 일이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기껏 음악을 듣는 것처럼 별 거 아닌 일에도 ‘성찰’이 필요하다. 내가 무의식중에 어떤 태도로 음악을 대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꼰대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저도 모르게 민주주의의 가로막으로 살지 않으려면, 바보 같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바보처럼 그가 믿었던 세계를 기어코 이루겠다면, 아이들에게 마침내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물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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