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모가 매겨준 언론 독립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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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가 매겨준 언론 독립 성적표
[e야기] 고재열 시사IN 기자
  • 고재열 시사IN 기자
  • 승인 2009.05.26 13:5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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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열 시사IN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봉하마을 빈소는 ‘저널리즘의 무덤’이기도 했다. 일단 객관적인 상황이 너무나 열악했다. 기자들이 쓸 수 있는 실내시설이 전혀 없었다. 햇빛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갑작스런 소나기에 모두들 긴급대피를 해야 했다. 전원 연결할 곳도 없어서 화장실에서 전원을 끌고 와서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극복이 가능했다. 문제는 노사모의 문전박대였다. 참여정부 참모진으로 구성된 장례지원팀이 어렵게 마련해준 프레스센터를 급습한 노사모 회원들은 기자들에게 따져 물었다. “기자실이면 기자들이 앉아 있어야지 왜 작가들이 앉아있어? 다 나가” 김현 전 춘추관장과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까지 달려와서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기자들이 자리를 옮겼다.

가장 수난을 당한 기자들은 역시 조중동 기자들이었다. 노사모 회원들은 수시로 조중동 기자 색출작업을 벌였다. 프레스센터를 다시 만들며 장례지원팀은 기자들에게 프레스카드를 발급했다. 그런데 조중동 기자들에게도 프레스카드를 발급했다는 것을 알게 된 노사모 회원들이 항의했다. 회원들은 조중동 기자의 프레스카드 일련번호를 메모해 가서 찾아다녔다.

조중동 기자가 수모를 겪는 것을 두 번이나 직접 목격했다. 둘 다 동아일보 기자였다. 동영상 촬영을 하는 기자가 쫓겨나는 것은 눈앞에서 보았고 취재 여기자가 포위된 것은 멀찌감치 보았다. 장례지원팀 관계자들이 달려와서 구출해 주어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참 갑갑했다.

조중동 기자뿐만 아니라 최근 정부 편향 보도를 하고 있다는 연합뉴스 기자들도 색출 대상이었다. 연합뉴스에 대한 항의도 만만치 않았다. 이 색출 작업의 최대 피해자는 KBS 기자들이었다. 가장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노사모 회원들은 편파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KBS 뉴스 중계차를 쫓아냈다.

빈소 옆에서 쫓겨난 KBS 뉴스 중계차는 1km 이상 떨어진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중계차 옆에서는 황소들이 낮잠을 자거나 ‘풀을 뜯어먹고’ 있었고 농부들이 논두렁에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빈소’옆이 아닌 ‘황소’ 옆에서 뉴스를 전하는 KBS 기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사주나 사장의 잘못 때문에, 혹은 권력 눈치를 보는 데스크 때문에 일선 기자들의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

노사모가 조중동 기자들의 취재를 봉쇄하는 것은 일종의 ‘연좌제’라 할 수 있다. 사주와 데스크의 업보 때문에 취재기자들이 욕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취재를 막지 말고 바른 취재를 하는 지 감시하는 게 맞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전하지 못했다. 그것이 ‘특정언론 죽이기’가 아니라 ‘언론개혁’을 추진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상실감에 분노로 가득 찬 그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 봉하마을 장례지원팀에서 임시 프레스센터를 설치해주자 기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독설닷컴
기자들을 동정하면서도 노사모 회원들의 취재 보이콧 정도가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언론사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루고 있느냐 아니면 해당 기자가 ‘사주나 경영진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루고 있느냐, 하는 척도와 거의 비슷하게 들어맞았다. 노사모가 ‘언론독립 성적표’를 매겨준 셈이었다.

현장에서는 조중동과 연합뉴스, 그리고 KBS 기자들만 애를 먹은 것이 아니었다. MBC나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같은 언론사의 기자들도 역시 환영받지 못했다. 노사모 회원들은 저널리즘을 총체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은 “한겨레 경향도 다 똑같아. 니들이 노무현을 죽였어”라고 말하며 항의했다. 프레스센터에 항의하러 온 노사모 회원이 던진 물병을 맞은 사람은 프레시안 기자였다.

이런 ‘저널리즘의 무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박쥐 행태를 벌이며 처신했다. 빈소 옆을 취재할 때는 프레스카드를 목에 걸었고 노사모 전시관에 들어갈 때는 노사모 비표를 목에 걸었다. 노사모 전시관은 기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예외였다. 나를 블로거로 소개했기 때문이었다(다행히 모두들 ‘독설닷컴’을 잘 알고 있었다).

주류 언론을 홀대한 것과 반비례해서 비주류 미디어는 환대했다. 많은 블로거들이 노사모 전시관에 둥지를 틀고 봉하마을 빈소 소식을 전했다. 노트북 컴퓨터도 가져가지 않았던 나 역시 노사모가 제공해준 컴퓨터를 이용해 블로그에 글을 올릴 수 있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 투쟁에 소홀하면 근로조건이 열악해진다. 봉하마을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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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2009-05-26 18:03:51
‘취재를 막지 말고 바른 취재를 하는 지 감시하는 게 맞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전하지 못했다.

-------> 조중동은 언론이 아닌 정치 조직. 따라서 취재 못하게 막는 게 당연.

... 2009-05-26 18:46:59
저널리즘을 망각한 기자들에 대한 조롱과 취재 거부를 보고 어떻게‘연좌제’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는지...그리고 무책임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기사의 책임을 단순히 사주와 데스크의 업보로 돌릴 수 있는 문제인지...모든 기자는 데스크나 사주의 대필작가란 말인가?

ㅋㅋㅋ 2017-12-23 15:44:28
머리 OS가 온통 '꿘'인 사람들은 현대차사주나 현대차정규직노동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고 전제하고 주장하겠지만, 일반인들에겐 현대로 묶인 그 놈이 그 놈이예요. 언론사 데스크와 일선기자들 관계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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