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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으로부터의 자유
  • 승인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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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결국 그 기사를 싣기까지 나는 일주일간을 거의 끙끙 앓고 지냈다.
|contsmark1|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의 부적절한 발언.
|contsmark2|그 문제의 발언이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인 나에게 제보된 것은 10월24일이었다. 이 장관이 출입기자단과 폭탄주를 마시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가슴과 구로공단 여공의 팬티에 대해 언급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contsmark3|그것을 11월2일 <장관과 기자, 폭탄주와 공인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기까지 꼬박 일주일을 나는 ‘인정이 중시되는 대한민국에서 기자로서 할 말을 하고 산다는 것’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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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지난 2월22일에 창간된 오마이뉴스에는 10개월동안 2만2422개의 기사가 올라와 있다. 이장관 발언건은 그 기사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게재여부를 놓고 고민한 기사이다. 논란이 많았던 민주당 젊은의원들의 5·18광주 술자리사건을 취재했을 때 기사가 작성된 지 5분만에 게재결정을 했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오랜 진통을 거친 셈이다. ‘싣자’와 ‘싣지 말자’는 두 개의 논리가 내 머리 속에서 아침 저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일주일간의 갈등 끝에 싣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것 중의 하나는 이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기자윤리의 핵심 중 하나는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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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9|내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것은 1988년 1월3일 말지에서였다. 그후 13년째 기자생활을 해오면서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 기자는 크게 두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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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2|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취재원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 일이다. 나는 기자초년 시절 주한미군 범죄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수많은 한국인 희생자들을 만났다. 노근리에서 만난 한 노인은 말했다. “45년만에 내 속에 있는 말을 처음으로 풀어놓은 것인데… 지금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들을 인터뷰해 사연을 기사화하는 것은 일종의 ‘한풀이굿 대행’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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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5|그런가 하면 기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한다. 부정부패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은 행위에 관련된 인사를 기사화할 때, 특히 그 기사를 맨처음 단독으로 기사화할 때 그 사람의 사회적인 권위를 실추시키는 작업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 없다는 이야기와 ‘그럼 나는 깨끗한가’를 되돌아볼 때 이미 다 작성된 기사인데도 ‘enter키’를 누르기란 여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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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8|더군다나 한국은 ‘인정’에 기반을 둔 사회다. 학연, 지연, 혈연은 물론 한번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 정이 만들어지는 사회다. 그 인정은 개인 사이뿐 아니라 집단 사이에서도 쌓인다. 고위공직자들과 출입기자단 사이에 쌓이는 인정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쌓여온 ‘인정’은 문제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측량하는 것을 방해하곤 한다.
|contsmark19|내가 한참 이장관 발언의 기사게재 여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관계당국에서 나의 학연과 지연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곧 그런 연을 갖고 있는 인사들의 전화가 내게 걸려왔다. 그들의 “심사숙고 하라”는 충고는 매우 세련된 것이었고 일면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런 전화는 솔직히 나의 마음을 잠시나마 흔든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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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2|그래서 나는 이장관 발언건과 관련해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몇몇 언론인과 시민운동가들을 일부러 만나봤다. 그들 중에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그 자리에 25명의 기자가 있었는데도 아무도 아직까지 문제제기 안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만약 오마이뉴스도 이 기사를 싣지 않는다면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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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5|때로 인정은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못쓰게 한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인정에 얽힌 사회’는 문제 그 자체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오마이뉴스가 이장관 발언건을 보도했을 때 적지 않은 언론인들이 “그것이 무슨 뉴스거리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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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8|언론이 오랫동안 해야 할 말을 못해 온 대한민국같은 나라에서 기자윤리의 핵심은 ‘기자가 써야 된다고 생각한 것을 기어이 쓰는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그동안 지목되어온 것이 주로 권력과 자본 그리고 폭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같은 나라에서는 그것 못지 않게 ‘인정(인간관계)으로부터의 자유’도 기자윤리의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언론의 존재이유는 비판기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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