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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KBS에 다시 적용한다면?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했다고 보기 어렵다.”

2004년 탄핵방송을 연구한 한국언론학회(회장 박명진)가 지난 2004년 6월 10일에 발표한 ‘대통령 탄핵 관련 TV 방송내용 분석’ 보고서의 내용이다. 당시 방송위원회(위원장 노성대)로부터 의뢰받은 이 보고서에는 3월 12일 국회의 탄핵안 가결 후 방송사의 탄핵 관련 보도가 공정성을 잃은 편향적 보도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12~13일 이틀간의 뉴스 특보·속보와 14일부터 1주일 동안의 정규 저녁뉴스, 시사·교양·정보·토론 프로그램 등 총 96시간에 이르는 탄핵 관련 보도를 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이미지 구성과 앵커와 출연자의 언어 표현 등으로 낱낱이 분석, 첨예한 갈등 상황에 대한 방송사의 편향 보도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 지적했다.

당시 보수언론을 비롯해 많은 매체에서 이 같은 보고서의 결과를 받아썼다. 그리고 한국언론학회 회장이었던 박명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됐다.

▲ MBC < PD수첩> (왼쪽)과 SBS <뉴스추적>

시간은 5년이 흘렀고, 다시 노무현이다. TV에는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관련 특집물이 채워지고 있다. 장례위원회로부터 공개된 미공개 사진을 통해 생전 고인의 모습을 되짚어 보는가 하면,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참여정부 수장에서 봉하마을의 촌부의 모습까지 소탈한 그의 모습을 TV에서 보여주고 있다. 서거를 한 당일 날부터 시작해 26일에는 MBC 〈PD수첩〉, 27일 KBS 2TV 〈30분 다큐〉, SBS 〈뉴스추적〉, 28일은 MBC 〈뉴스후〉 등 노 전 대통령의 생애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또 30일 KBS는 〈다큐3일-서거 후 3일간의 기록〉을, 31일에는 KBS스페셜 〈노무현이 남긴 숙제〉를 방송할 예정이다.

하지만 방송사에 따른 온도차는 분명하다. KBS에는 ‘불공정’의 목소리가 다분히 높다. 특히 시민들의 목소리가 따갑다. KBS 카메라를 짊어지고 타고 올라간 사다리는 시민들에 의해 걷어 차이고, KBS 로고가 찍힌 기자는 현장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쫓겨나가기 일쑤다. 현장 취재진의 절망감과 자부심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KBS 보도본부장은 “인터뷰가 정치적 구호가 들어갔다”며 라고 조문객 인터뷰를 누락시키는 등의 일을 저지른다. 이 같은 소식에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이런 KBS는 지난 27일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아달라는 듯 노 전 대통령 서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KBS는 “KBS 한국방송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관련 방송 시간이 지상파 방송 3사 가운데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KBS는 “시청률 조사기관 TNS의 시청률표를 통해 노 전 대통령 서거일인 23일과 24일 양일간의 방송 시간을 조사한 결과 KBS는 904분으로 MBC의 824분, SBS의 643분보다 많았다”고 분석했다.

▲ 지난달 22일 방송된 KBS 1TV <뉴스9> ⓒKBS
특히 KBS는 “속보와 특보가 모두 12회 630분으로 타사의 447분, 376분보다 월등히 많았다고 한다”면서 “이와 함께 서거 당일 23일에는 모두 495분의 속보와 특보를 통해 노 전 대통령 서거 관련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했다”고 강변(?)했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오해를 한 것일까. 불공정하기는 커녕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KBS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보도했는데 시민들의 반응은 왜 이렇게 차가울까. 

게다가 한국언론학회가 지난 탄핵방송 때 적용했던 기준을 고스란히 가져와보면 아이러니하게도 KBS는 가장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방송사로 분류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보도양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조중동식의 프레임으로 보자면 이명박 정부 하에서 임명된 이병순 사장은 '친노세력'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런 식이라면 KBS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언론사가 된다.

이 같은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뭘까. 애당초 방송의 보도양을 기준으로 한쪽에 편파적이었다며 ‘공정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2007년 영국 BBC가 21세기를 맞아 제정한 ‘불편부당성에 관한 12가지 지침’을 살펴보자.

“불편부당성은 BBC의 핵심가치이며 법적 기준이며 동시에 BBC의 자존심이다.”
“불편부당성을 위해 결론 없는 재미없는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는 없다. BBC의 senior editor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근거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사안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불편부당성은 쉽지 않은 문제이며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BBC의 저널리즘 전문가들은 매우 어려운 불편부당성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

결국 방송의 ‘불편부당성’은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는 시민들이 하는 것이다. 지금 KBS의 기자와 PD들이 봉하마을과 대한문 앞 추모현장에서 취재거부를 당하고 있는 현상은 보도양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KBS 노동조합을 비롯해 KBS PD협회와 기자협회가 지적하듯 공정하지 못한 보도에서 시민들의 분노가 발생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끝난 뒤 박 위원장은 과연 방송사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까. 탄핵 때와 마찬가지로 서거 방송 시간을 세어보고, 노 전 대통령 입장만 실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그래서 편파보도를 했다는 방통심의위의 제재가 내려질까 자못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지난 98년 KBS 차장급 PD, 기자 등 50여명의 필진과 언론학자들의 1, 2차 감수를 거쳐 6개월간의 긴 작업 끝에 태어난 ‘KBS 방송제작가이드라인’ 한 구절을 박 위원장에게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KBS의 방송제작자가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내리는 모든 판단은 KBS에 대한 시청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시청자의 신뢰는 한 번 훼손되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다는 점을 방송제작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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