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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의 책읽기] (18)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한국문화인류학회, 일조각, 2009)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학문은 무엇일까? 경제학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경제 정책 자체를 움직이는 것을 볼 때의 몸 사리는 것을 보면, 그 이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지가 느껴진다. 그건 비단 주류 경제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대가들이 만들어놓은 몇 가지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야 더딘 한 걸음을 느낄 수 있다. 정치학도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00년 동안 똑같이 ‘권력’의 문제에 대한 관점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큰 프레임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정치학도들은 여전히 마키아벨리를 읽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더 내려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읽는다. 동양의 고전 공자/맹자도 마찬가지.

사회학이 좀 급진적으로 보이긴 한다. 이론이라는 것들이 항상 백가쟁명하는 상황이고 어제의 잘나가던 이론들의 파산하는 소리가 오늘에는 반드시 들린다. 마찬가지로 한 100년 정도만 버텨주면 완전히 대가가 된다. 뒤르켐이나 베버처럼. 100년 후면 아무도 베버를 안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 주장이 온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이라는 장 자체가 굉장히 상호간에 스며들어가 있고(표준 경제학은 어느 정도는 공학이나 응용물리학처럼 조금 다른 궤에 진입한 것으로는 보인다.), 사회학의 대가 중에 경제학의 대가가 있고, 정치학의 대가라는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사회학과 경제학에 물려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슘페터 같은 이가 있다). 하지만 한정적으로 분과학문의 경계를 지지할 수는 있다. 사실상 20세기 초반 케인즈와 버틀란트 러셀의 시대를 지나면서 르네상스적 지식인이 사라지고, 그 이후의 학문 전개라는 것이 각자의 분과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돼 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회학이 개중에는 가장 급진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회학에서 튀어나온 문화인류학. 인류학의 분과야 말로 가장 급진적인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왜냐고??

바로 문화적 상대주의 Cultural Relativism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상대화 된다.

▲ 한겨레 5월 16일 8면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을 읽으면서 그러한 ‘상대화’에서 나오는 편견 벗기기를 맛본다. 이를테면 남성성/여성성, 젠더의 문제를 볼 때 그렇다. 우람하고 씩씩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 온유하고 따뜻하고 포용성 있는 여성의 신화. 사실상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질 따름이다. 어떤 섬의 부족에서는 우리가 ‘남성성’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이 여성의 ‘여성성’의 범주에 속하고, 또 다른 부족에서는 ‘남성성’이라는 속성을 남/녀 공히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또 김치의 예가 나온다. 우리는 김치가 한국인의 ‘대표음식’, ‘전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맵고 알싸한 김치를 먹기 시작한 건 최대 잡아야 300년이다. 매운 고추가 들어온 지 300년, 지금 우리가 먹는 포기김치의 배추가 들어온 지 100년이다.

“바로 그 때문에 문화는 흔히 ‘하나의 인간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나 신념’ 또는 ‘삶의 디자인’ design for living이라 정의되지만,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 간에 ‘공유된 무관심’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그 문화의 기본적인 가치나 여러 특질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 즉 의문을 품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p.29-30).”

인류학은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의 범주라는 것들이 사실상은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역사에서 ‘발명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있지도 않았던 찬란함을 회고할 따름이다. 고구려를 구성했던 말갈족들을 당신은 우리 민족의 선조라고 생각하는가? 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말장난이다. 그런 건 있어본 적이 없고 다만 그렇게 불러서 존재할 따름인 것이다. 결국 ‘민족’으로 우리가 우리를 호명했을 때, 그 바깥의 것들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결론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얼마 전 있었던 황석영 파동도 사실상은 민족주의자의 궁극적인 결론이 ‘제국주의적’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민족국가에 대한 담론이 최초에는 저항적인 성격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것은 곧 민족국가 프로젝트(국민 만들기)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저항적 성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을 때, 곧이어 더 큰 ‘우리’를 상징하고 그것은 ‘몽골 + 2 코리아 담론’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헨드릭스/ 블로거
아득한 고구려의 시대와 고조선의 시대를 상상하면서 그 시절을 우리의 ‘오래된 미래’로 상상한다. 하지만 그 역사는 ‘그 시절’의 영광의 역사일 뿐,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다. 다 같은 민족이라는 환상은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같은 민족’이니까 화합하라면서 다그칠 따름이다. 그리고 그 ‘미래’로 가는 길에는 피가 낭자할 것이다. 일본을 욕할 것이 없다. 그들의 ‘대동아 공영 담론’이나 황석영의 ‘몽골+2 코리아 담론’이나 본질적으로 패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임은 별 차이가 없다.

황석영은 꿈을 꿨을 것이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요동을 정벌하던 광개토대왕의 찬란한 제국을. 하지만 그게 꿈이기에 그 꿈을 꾸면서 하는 이명박이 중도실용주의자라는 말 역시 잠꼬대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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