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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고독한 러너’

|contsmark0|조용필 콘서트 2000 (11월9∼14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의 부제는 ‘고독한 러너’이다. 일년 전 대중가수로서는 처음으로 같은 장소에서 콘서트를 열었던 그는 공연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고독이야말로 나의 음악을 지켜온 힘”이라고 말했다. 고독, 음악, 힘, 이 세 단어야말로 그가 살아온 반세기를 농축하는 키워드다. ‘고독한 러너’는 그의 14집 앨범에 실려 있는 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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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라는 표시도 없이/ 인생이란 고독한 길을 뛰어 가네/ 사랑도 미움도 스쳐간 길/ 꿈속에 보이는 고독한 길 -곽태요 작사 조용필 작곡 ‘고독한 러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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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0|인터뷰 도중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마라톤 대회에서 마지막까지 외롭게 달리는 노인을 보며 저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했다.” 연보로 보면 1950년 생이니 그도 이제 만으로 쉰 살이다. 고등학교를 마치던 열 여덟 살부터 ‘가출’까지 감행하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니 삼십 년 넘게 꾸준히 노래한 셈이다. 한국의 사오십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따라 부르며)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도 ‘툭 치면 탁 나올’ 정도가 되었다. 가요계의 신화(전설을 넘어섰다), 국민가수, 슈퍼스타에서 노래의 지존, 가수왕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대한민국의 노래세상에서만큼은 공식이건 비공식이건 왕좌를 넘겨준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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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3|웅얼거리며 부른 노래가 아니었다. 몸을 흔들어 꼬며 눈길을 끌어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노래는 언제 어디서고 ‘절창’이었다. 한 장르에 기대선 적도 없었다. 발라드, 록, 포크, 민요, 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 머물러도 그의 소리엔 혼과 힘이 배어 있었다. 대중음악사에서 ‘열광’이 있는 공연의 시작은 그로부터였다. 무대의 열정이 객석까지 달구려면 제사장(가수)의 카리스마와 주문(노래)의 힘이 필요한데 그와 그의 노래에는 특별한 자력이 있었다. 그 아우라(aura)로 그는 서른 해 넘게 음악적 자존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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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8|“내 마음 외로워질 때면 그 날을 생각하고/ 그 날이 그리워질 때면 꿈길을 헤매는데/ 우/ 못 잊을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박건호 작사 조용필 작곡 ‘단발머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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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3|작금의 버전으로라면 아마도 제목이 ‘노랑머리’ 쯤 될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후끈거린다. 짐작컨대 그는 눈앞의 환호보다 팬들의 갈채가 끝난 후의 외로움을 늘 떠올린 듯하다. 짧은 글짓기로 그의 음악적 삶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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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8|“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 거야/ 모두가 숨어 버려 서성거리다/ 무서운 생각에 나는 그만 울어 버렸지/ 하나 둘 아이들은 돌아가 버리고/ 교회당 지붕 위로 저 달이 오를 때/ 까맣게 키가 큰 전봇대에 기대앉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 ‘못 찾겠다 꾀꼬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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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3|그가 가요계를 평정하고 있을 때 현실정치의 표정은 황량하고 고단했다. 암울한 정치상황에서 사랑타령만으로 대중을 감싸안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가수왕의 처신답게 간지러운 사랑노래보다 서사적 여운이 있는 노래를 적지 않게 불렀는데 ‘못 찾겠다 꾀꼬리’도 그 범주에 든다. 저항시인 김지하와의 교분도 풍문처럼 들리던 시절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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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6|대중가요는 글자 그대로 대중을 위한 노래이다. 그들의 정서를 무시한다면 애당초 존재가치를 의심받게 된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노래의 반 이상은 이별노래이다. 얼핏 떠올려봐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와 패티김의 ‘이별’ 그리고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에서부터 서태지의 ‘난 알아요’까지 한결같이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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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9|20세기의 끝자락에 한국 대중이 꼽은 지난 세기 대표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큰 가닥에선 이별노래였다. 이 노래의 핵심은 풍경과 인생의 부조화다. 꽃 피는 동백섬에도 계절의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지는데 갈매기만 슬피 운다고 느끼는 인심은 그리운 형제가 연락선 타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까닭이다. 이별 많은 백성의 설움을 곡진하게 풀어냈을 뿐더러 조용필의 가창이 대중의 심금을 울린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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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2|그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번 무대에 3억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공연 준비기간 중에는 목에 무리가 안 가도록 하기 위해 대화조차 자제한다는 그다. 단순한 엔터테이너 혹은 쇼비즈니스맨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는 아티스트이자 프로페셔널이다. 그의 왕좌가 쉽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예술의 세계에서는 장기집권도 때론 아름답다. 그가 자주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딴따라 기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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