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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의 책읽기] (19) 침이 고인다 & 너는 어느 쪽이냐…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해서> (김훈, 생각의나무, 2007)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고인은 모두의 애도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 노무현’의 ‘오욕과 영광’의 63년이 TV 화면을 지배했다. 덕수궁 분향소에는 애도하는 시민행렬이 가득 찼다. 3시간씩 기다려 조문을 했다. 봉화마을에서는 준비한 육개장이 다 떨어져 라면으로 조문객을 맞아야 하기도 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울었을까?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김훈, 80) 사람들은 노무현을 보면서 그의 정책 때문에 운 것이 아니다. 그의 이념적 지향 때문에 울지 않았다. 그가 서민들의 벗이었기 때문에 운 것이 아니다. 허망하게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한 사람의 ‘삶’의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에 운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내의 심정이 그들이 울린 것이다. 그게 곧 자신의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답답함. 짓눌리는 마음. 거기에 이론 따위는 있을 여지가 없었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김애란, 152)
“어머니의 몸뚱이에선, 계절의 끝자락, 가판에서 조용히 썩어가는 과일의 달콤하고 졸린 냄새가 났다.”(김애란, 178)

▲ <침이 고인다>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2007)
김애란이 떠올랐다. 며칠 전 그녀가 노무현 국민장에 다녀와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92340415&code=940100). 노무현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 2002년 ‘노풍’이 불던 시절, 그리고 2004년 탄핵되었던 순간, 2008년 시골 촌로로 돌아왔던 순간들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진을 들쳐보고, 그의 어록을 살펴보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노무현에 대한 시민들의 기억은 단순한 ‘상징’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서민들의 몸에 대한 기억이었으리라. 몸에 새겨진 칼자국과 추억되는 달콤한 ‘냄새’의 추억. 시민들이 구체적인 자신의 삶의 ‘고통’과 ‘추억’ 그리고 노무현의 기억을 함께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을 때, 나 역시 함께 ‘인간 노무현’에 대한 추모를 했다.

그런데 운구 행렬 뒤에 갑자기 한동안 잊혀졌던 ‘그들’이 돌아왔다. 유시민이 돌아왔고, 안희정이 돌아왔다. 망자 곁의 그들의 목소리가 미덥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 경제적 위기라며 북핵 위기라며 대동단결을 말하는 ‘조중동’의 목소리가 역겨우면서도 동시에 MB 정권에 대한 분노를 내뿜는 그들의 목소리와 노무현의 고통의 절절함에는 왠지 거리가 느껴졌다. 그 거리감에는 MB 정권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로 묶일 수 없다는 사실이 있다.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의 부분이 있다. 단적으로 노무현 정권 시절 2003년에만 5명이나 목숨을 끊었던 노동자들의 원혼과 같은 해 멕시코 칸쿤에서 목숨을 끊었던 농민운동가 이경해의 원혼이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정권에 욕을 하던 사람들은 순전히 뭘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서민들이 이명박을 찍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노무현에 대한 추모와 MB 정권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 하나로 묶여 하나의 전선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의 오열과 노무현의 벗들의 눈물과 분노와 호통에 작년 불었던 촛불의 함성이 보태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노무현을 추모했던 ‘서민들 삶의 구체성’이 있을까? 정권에 대한 반대 사이의 많은 차이들 - 정책적 차이든, 계급적 차이든 -이 그 사이에서 숨 쉴 틈이 있을까?

▲ 헨드릭스/ 블로거
그 차이들이야 말로 ‘정치’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인데 그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정권에 대한 맹목적 분노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냉정하게 평가해야할 것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죽는 일은 무섭지만,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 일상의 삶은 더욱 무섭다.”(김훈, 137) 우리가 분노에 치를 떠는 시점에 묵묵하게 삼성 공판은 삼성측의 무죄로 끝이 나고 용산에는 철거 인력이 들어가서 조용히 철거를 시작했다. 추모와 평가의 사이에서 여전히 정권은 할 일은 하고 있다. 싸워야 할 장소와 시간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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