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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방송 다시보기(28)]

드라마 <전원일기> 1980년 10월 21일 ‘박수칠 때 떠나라’를 제목으로 첫 회를 방영했다. 이후 2002년 12월 종방 때까지 1000편이 넘는 흙냄새 나는 영상으로 사랑받았다. 작가 김정수는 전원일기를 가장 오랫동안 집필했던 작가다. 81년 5월부터 93년 12월까지 전원일기의 절반이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나와 1979년 MBC 개국 드라마 공모에 당선돼 방송에 데뷔한 김정수가 전원일기를 쓰기 시작할 땐 서른 갓 넘은 새댁이었다. 김신조가 내려왔던 1968년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그해 말 아버지가 쓰러졌다. 여수에서 날리던 여학생은 졸지에 가장이 됐다. 나이 스무살에 “버스표 한 장 벌 수 없는 무능력자”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대학 졸업 뒤 교사가 되려고 여기저기 원서를 냈지만 미끄러졌다. 우연히 <주간 시민>에 들어가 유능한 문화부 기자가 됐다. 경찰 출입기자를 하겠다며 부장에게 조르는가 하면 10월 유신의 서울 거리를 뛰어다니며 세상을 4년이나 배웠다.

▲ 드라마 <전원일기>
김정수는 여느 인기 작가들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아침 6시반 쯤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고 토요일 낮이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 목포에서 올라오는 남편을 맞아 화요일 낮까지 보냈다. 목포대 교수인 남편과는 20년 동안 주말부부였다. 김정수는 집하고 전원일기 밖에 몰랐다. 친구도, 취미도 오락도 없었다.

주중에는 6개의 일간지와 농민신문, 월간 <새농민>을 읽고 스크랩했다. 2주에 한 번씩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전원일기> 2회분 원고를 넘기고 수요일 아침엔 방송국에 나가 드라마 연습에 참가했다. 80년대 초 <전원일기>를 막 시작할 때 배우 김혜자는 김정수에게 대놓고 “아무나 쓰는 게 아닌 작품”이라고 일갈했다. 김혜자는 “철없어서” 한 말이라고 했지만 김정수는 그 말을 가슴에 꼭꼭 새겼다.

아내 김정수가 “치열하게 기저귀 빨며” 사느라고 문학과 담 쌓고 지낼 때 남편 유금호는 <현대문학>에 자주 작품을 발표해 많이 약 오르게 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처지가 바뀌었다. 남편은 박사학위에 매달리느라 소설을 놓았고 김정수는 두 살 터울의 딸, 아들을 키우며 <전원일기> <겨울안개> <엄마의 바다>를 쓰며 견실한 작가로 성장했다.

▲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과수원을 했던 시아버지에게 김 회장(최불암)을, 고향의 친척 동생에게서 양지뜸 청년(유인촌)을, 성남 모란시장에서 만난 할머니에게서 일용 엄마(김수미)를 찾아냈다. 이런저런 연예계 상을 받았지만 김정수는 84년 전국 농업기술자협회가 준 제1회 흙의 문예상을 좋아했다. 양파 파동과 돼지 파동을 그린 공로로 받은 상이라서. ‘돼지 파동’편은 끝내 전파를 타지 못했다.
뉴스가 세상을 외면했던 5공, 6공 내내 김정수는 <전원일기>를 부여잡고 세상을 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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