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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야기]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일 오전 16차 라디오 연설에서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언급했다. 언급만 했을 뿐 대부분의 연설을 북한 핵실험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할애했다. 이번 대통령 연설은 북핵에 가장 많은 비중을 뒀다. 그러나 이 역시 대안은 없었다. “핵실험이 세계 모두에 큰 실망과 충격을 줬다.” “위협에는 당당히 맞설 것”이라는 이미 알려진 원칙론을 되풀이 했다. 대통령은 연설 끝에 노 전 대통령 사망을 염두에 두고 “슬픈 마음을 추스르고 밝은 미래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지만 새 출발을 위한 어떤 대안도 내놓지 않았다.

대통령 라디오 연설하면 루스벨트의 노변정담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대통령 라디오 연설은 있었다. 20년 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KBS와 MBC, CBS 라디오 방송에 <대통령에게 듣는다>란 이름으로 매주 월요일 출연해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처럼 제 할 말만 일방적으로 연설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주례연설을 녹음하고 있다. ⓒ청와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정 라디오방송 첫 회는 1989년 6월5일 월요일 오전이었다. 딱 20년 전 요맘때였다. 당시 첫 방송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으면서>라는 제목이었다. 대통령은 대학가 시위와 노사 충돌현상을 걱정하면서 체제 수호를 위해 자제해야 한다는 요지를 주장했다. 전날 녹음한 것이라서 단비가 촉촉이 내린 날 아침에 가뭄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에드립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대통령은 대학 시위나 노동자의 파업에 대한 기존주장을 반복했다. 어떤 새로운 방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1989년 6월12일 두 번째 방송에서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이겨 가는 길>이란 제목 하에 경제회복을 위해 근로자는 지나친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기업인은 노사 신뢰구축에 앞장서야 하며 국민은 과소비를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노사분규로 올해(1989년) 1-5월 동안 빚어진 생산차질이 3조원에 달한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천안문 시위까지 거론하며 임금인상을 자제하지 않으면 더 큰 파국이 올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협박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정부의 대통령이 하는 방송과 가히 다르지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첫 방송 이틀 전인 1989년 6월3일 KBS와 MBC 노동조합은 “대통령 라디오 방송의 일방적 편성은 취소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공동성명을 내고 “방송사 쪽의 희망과 협의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강제 편성돼 사실상 방송의 자율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두 노조는 “방송은 하되 그에 대한 반론이나 반응보도는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MBC는 첫 대통령 방송이 나간 다음날인 6월6일 세 야당 부대변인들의 논평 방송을 내보냈다.

▲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당시 최병렬 문공부 장관(전 한나라당 대표)은 “국가 원수인 대통령 연설은 그 성격이나 외국의 예에 비추어 반론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세 방송사 노조는 1989년 6월12일 최 장관의 발언에 대해 “문공 장관의 (발언은) 전체 언론에 대한 도전”이라며 장관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당시 세 방송사 노조는 공히 대통령 국정 라디오방송의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았다. 방송 결정의 절차적 문제와 함께 반론권을 둘러싸고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년 전 정부는 대통령 방송을 기획하면서 “국정의 주요 현안을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설명하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취지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 치도 변하지 않은 낡은 틀이 그대로다. 애매하고 추상적인 단어의 남발이나 이미 보도된 정부정책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어설픈 ‘감성 전략’까지 똑같다. 집회나 시위를, 노동자를 보는 시각에서 두 대통령이 어쩜 그리 닮았을까. 보수신문의 하루치 사설만 보면 다 아는 내용을 굳이 아까운 전파를 낭비해가면서 그 바쁜 대통령이 직접 나설 필요까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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