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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KBS PD집필제 추진에 대해

며칠전 아시아방송작가 컨퍼런스에 이노우에 타카시 씨가 참석했다. 그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NHK의 중량급 피디였다. 2007년 퇴직하기 전까지 <대황하>, <대몽골>, <731세균전부대>, <신 실크로드> 등 세간에 널리 알려진 NHK의 대형 다큐멘터리를 여러편 제작한 바 있다.

KBS가 요즘 NHK를 벤치마킹하여 이른바 ‘피디집필제’라는 것을 시행한다고 하기에 정통 NHK맨 출신인 그의 의견을 물어봤다. 그런데 답변이 의외였다. “NHK 피디들은 그럴 수 있는 훈련을 거쳤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작가를 안쓴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본의 다른 방송들 봐라. 모두 작가를 쓰지 않냐”라는 것이다. NHK 피디는 입사하면 무조건 지역에서 4년 이상 근무해야 하는데, 이 4년 동안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취재, 촬영은 물론 스토리텔링과 글쓰기의 기본기를 조련받은 후에야 본사에 발탁된다는 것이다.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그런데 모두다 아시는바와 같이 KBS는 이러한 피디 트레이닝 시스템을 가져본 적이 없고, 이런 트레이닝 시스템을 갖출 예정도 없다.

게다가 NHK는 시사교양 피디 숫자가 KBS 피디 숫자의 두 배에 달한다. 이 숫자로 NHK는 종합채널 1개를 운용하는데 KBS는 그 숫자로 종합채널 2개를 운용한다. KBS와 NHK 사이의 이 엄청난 간극-이 간극을 메꾸어온 것은 순전히 한국인의 맨파워이며, 그중에서도 수훈 갑은 한국 방송이 채택해온 작가 시스템이었다. NHK에는 없고 KBS에는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30여년간 한국 방송의 발전이 피디-작가 협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NHK와 달리 한 사람의 피디가 고작 1년 미만의 AD를 거쳐 바로 프로그램으로 입봉하는 체제에서, 우리 방송이 무난히 전진해온 것은 그 덕분이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이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이 제작현장의 혼란만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KBS는 번연히 NHK와 다른데 껍데기만 흉내낸다고 NHK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NHK와 다른 우리 방송의 역사와, 우리만의 독특한 작가 시스템과, 그 시스템이 형성되고 구축되어온 30년 세월을 현실로 인정하고 볼 때에만, 형식론이 아닌 진정한 피디 역량 강화 방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피디집필제는 방송사에 기여해온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존재가치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이 직종 자체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무리 말로 그렇지 않다고 한들, 피디 집필이 ‘제도화’의 탈을 쓰는 순간, 그리고 피디 집필율 할당이라는 ‘강제’의 모양을 띄는 순간, 그것은 위험한 흉기가 된다. 그것은 비단 작가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흉기만이 아니고, 자발성을 그 근간으로 하는 피디의 창의력을, 방송 콘텐츠의 질을 위협하는 다목적 흉기가 될 위험이 다분하다.

▲ 김옥영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방송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민되어야 할 것은 콘텐츠의 품질이다. 그러나 근자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른바 ‘피디집필제’에는 이 고민이 빠져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은 연습게임이 아니다. 국민을 상대로 프로그램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NHK 벤치마킹 좋다. 그런데 피디 역량도 강화 안되고, 경비 절감도 별로 안된다고 하고, 프로그램 품질은 곤두박질치기 딱 좋고, 여론은 뭇매를 때리고, 정작 KBS가 오매불망하는 NHK 피디조차 회의적인 이 제도를 KBS는 대체 왜 강행하려 하는가? 실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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