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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황량한 서부 벌판에서 무법자들에게 총알을 선사하던, 경찰이면서 법 대신 스스로 악당을 응징하던, 그런 이스트우드옹께서 자신이 출연하는 마지막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마지막 선택한 방법은, 공교롭게도 늦게나마 영화를 보는 지금의 시기에 맞물려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몇 년 전 어떤 분한테서 격이 없는 자리에서 이런 얘길 들었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고 믿는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의 결정적인 약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양심과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웃기죠, 양심과 이성이 약점이라니? 반대편의 족속들이 공격하기에 가장 좋기 때문에 약점이라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논리적으로 맞는지를 너무 돌아본다는 거지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걸 대중들이 항상 지지하고 좋아할까요? 저들이 일시적으로 패퇴한 후 궁지에 몰린다 싶을 때 그 약점을 헤집고 들어오지요. ‘국민 통합’ ‘포용’ ‘대화합’ 뭐 이런 겁니다.

나중에 다시 그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는, 통합과 포용은 내 팽개치고 철저하고 잔인하게 보복하지요. 왜? 그들은 애초 이성과 양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저들이 잠시 권력을 놓친 틈에, 통합과 포용과 화합이라는 말로 목숨을 구걸할 때, 그런 건 잠시 접어두고 단호하게 집행해야 됩니다, 법과 원칙의 이름으로 빠르고 강하고 철저하게. ‘니들도 똑같이 썩었잖아’라는 프레임으로 현혹할 틈을 주지 말고. 그것이 결국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볼 때 옳습니다!”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 어쩜 저들의 약점은, 애당초 도덕성과 진실과 정의 따위는 당연히 아니고, 그딴 걸로 부끄러워하는 족속들도 아니고, 어쩜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자신들이 가진 걸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대다수 사람들이 모든 진실들을 제대로 알고 그에 따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혹은 스스로 잔인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잔인하게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궁지로 몰리고 잔인한 희생을 낳고, 결국 패퇴로 이어질 순서… 총을 들고 있어 강하다고 여기겠지만, 두려움에 방아쇠를 당기지만, 그것은 더 이상 영원히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총을 들어서 환호를 받았던 배우가 생의 마지막 무렵 그 총을 용기 있게 내려놓습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예의 멋진 모습은 아니지만 총을 들긴 하지요. 그래서 마지막에도 그러리라는 자신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벗어 던지죠, ‘멋지지’ 않게, 그래서 멋지게. 고리타분하고 완고한 외톨이 백인 영감이, 72년산 ‘그랜 토리노’를 기꺼이 피부색이 다른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 것처럼, 완고하고 단호했던 노거장, 노배우의 마지막 선택을 경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 김기슭 SBS 제작본부 PD

우리는 영화의 그 이웃들처럼 목격자이자 방관자일 수 있습니다. 혹은 침묵의 가해자일 수 있고 피해자일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덕스러웠을 누군가들을, 스스로를, 후회하고 배척하고 분노하고 냉소하면서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기대감과 희망은 버려두지 맙시다. 죽음으로, 스스로의 희생으로 저들을 더더욱 두렵게 만든 계기를 주고 떠난 한 사람을 기억하며. 그 다음은 누구의, 어떤 선택이어야 할까요. 아득하기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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