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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재판장님

어느덧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난해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은 공영방송 사장이던 저를 참으로 구차스러운 방법으로 해임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KBS 사장 하나 잘라내기 위해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등을 총동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저한 비리가 있다느니, 무능경영이라느니, 인사전횡이라느니 하는 따위 인격적 살해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잔인했습니다.

해임위해 권력기관 총동원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말자, 조중동 등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저의 퇴진을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후인 지난해 3월에 들어서자 한나라당에서는 "정연주 사장의 사퇴가 0 순위"라는 말을 공식 회의에서, 또는 대변인 성명으로 쏟아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씨가 방송통신위원장이 된 후 김금수 KBS 이사장을 여러 차례 만나 저의 사퇴를 압박했습니다. 지난해 5월 15일, 뉴라이트 전국연합 등 우파 시민사회단체가 감사원에 KBS 국민감사를 청구하자 감사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엿새 만에 특별감사를 결정하고, 그 뒤 55일 동안 KBS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했습니다.

우파 시민사회단체가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하기 바로 하루 전날, 이번 사건의 고발인인 조상운 전 KBS 직원이 저를 배임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바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즈음, 국세청은 KBS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던 외주 독립제작사 7군데에 대해 세무조사를 시작했으며, 그 주된 공격점은 저의 '비리 여부'였습니다.

검찰은 6, 7월에 저를 잇따라 소환 통보했고, 그런 과정에서 배임 혐의에 대한 일방적인 수사 내용이 언론에 흘러나갔습니다. 당시 KBS 검찰 출입기자들은 "담당 검사인 이기옥 검사가 수사의지가 매우 강하며, 구속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이미 틀은 다 짜여져 있었고, 방향은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KBS 이사진의 친 정권화를 위해, 부산 동의대 교수였던 신태섭 이사를 KBS 이사라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해임시키고, 또 교수에서 해임되었다고 해서 KBS 이사 자리에서 쫓아낸 시기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7월 중순에는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KBS 사장은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 구현하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8월 4일, 검찰은 저에 대해 출국 금지조치를 내렸고, 바로 다음날, 감사원은 이례적으로 감사 착수 55일 만에 '부실 경영' '인사 전횡' 등의 이유로 저의 해임을 요구하는 특별감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8월 8일, KBS 이사회는 해임 결의를 했고,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은 마침내 저를 해임했습니다. 이 일련의 전개과정을 보면 저의 해임을 위해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톱니바퀴가 딱딱 물려서 돌아가듯 그렇게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도 바로 그런 톱니 중 하나였습니다.

해임된 바로 다음날, 8월 12일 검찰은 KBS의 '죽은 권력'이 되어버린 저를 체포하여 바로 이 법정 옆에 있는 건물로 데려와 가두었습니다. 1978년 가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된 지 꼭 3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35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역류했고, 국가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뒷걸음 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와 가치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아니 가장 기본적인 자유와 인간적 권리를 위해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루었는데, 그 민주주의가, 그 자유와 인간적 권리가 지난 1년여 동안 이렇듯 처절하게 침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1년여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검찰, 국세청, 감사원, 경찰 등 이른바 권력기관들은 민주적 가치나 절차, 인간의 기본 권리보다는 정권의 필요에 적극 부응하고, 때로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충성경쟁을 하면서 포괄적 권력남용을 자행해 왔습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권력에 봉사했습니다. 역사 앞에, 민족 앞에, 우리의 자식들 앞에, 그들은 치욕을 남겼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난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법정을 오가면서 제 머리와 가슴에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낭비가, 이런 비상식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이 말도 안 되는 이른바 '배임 사건'에 쏟아져야 했습니까.

처음 검찰 공소장을 읽으면서, 저는 검찰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서글픔이 앞섰습니다. 저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배임)'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죄목을 덮어 씌우면서 작성된 공소장의 구절구절은 기가 막혔습니다.

검찰의 수준 보여준 공소장

"공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추계조사 방법에 의한 세액 재산정 가능성도 거의 없어" "당시 공사가 상급심에서도 승소가능성이 매우 높아..." "소송을 취하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액 재산정 가능성이 거의 없다"니요. 검찰은 확률로, 또는 심증으로, 사람을 체포하고, 구속하고, 기소합니까. 검찰이 저를 배임죄로 엮으려면 '거의'가 아니라 '100%' 세액 재산정 가능성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법정에서 전율스러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KBS와 부가세 조정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던 고성춘 당시 국세청 법무2과장 법정 증언 때였습니다. 고성춘 증인은 검찰 조사 때, KBS에 대한 재부과 여부와 관련하여 그것이 '불가능하냐, 현실적으로 어려우냐'를 가지고 무려 4시간 동안 씨름을 하면서 시달렸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검찰은 '불가능'을 원했지요. 그래야 배임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을 테니까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국세청의 세금 재부과가 어렵기는 하겠지만 방법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니, 배임 적용은 근원부터 성립될 수 없는 것이지요.

국세청 법무과장 지낸 사람을 불러다 참고인 조사를 하면서 그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4시간이나 닦달을 했다고 하니, 이게 기본 틀과 방향을 죄다 미리 정해놓고 하는 표적수사, 기획수사, 정치수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핵심 쟁점은 국세청의 재부과 여부

국세청 직원도, 국세청의 소송대리인인 김앤장의 권은민 변호사도, 법률회사 율촌의 법률자문에서도, 경수근 변호사의 수임료 소송 판결을 내린 재판부도, 심지어 사장 재임시 저에게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강동순 KBS 감사 시절, KBS 감사실이 독립적으로 취한 법률회사 태평양과 다인의 자문에서도, 국세청이 재부과를 할 것, 또는 법원의 확정판결 이후에도 정당한 과세표준 및 세액 계산과 관련한 다툼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고 했는데도, 검찰은 유독 그 많은 수사자료와 증거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더구나 1심 판결에서 KBS의 주장은 틀렸다, 과세관청의 과세방법도 틀렸다, 추계과세 방법으로 재부과할 수 있다는 판결까지 나와 있는데, 그럼 국세청은 손을 놓고 스스로 존재이유를 부정한 채 징수권을 포기할 것이라고 검찰은 진심으로 믿었습니까. 아니면 고발인의 논리에 의존하여 표적수사, 기획수사, 정치수사를 한 것 아니었습니까. 사장 해임하는데 필요한 원인제공 만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KBS는 오랜 세월 동안 17건의 세금 소송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KBS가 1심에서 승소한 것도 있고, 패소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심에서 KBS가 '승소'한 것의 내용입니다. 법인세와 부가세 관련 소송의 1심 판결 재판부는 예외 없이 KBS의 핵심 주장인 "수신료 수입을 제외한 익금에서 모든 비용을 손금으로 처리한다"(법인세)거나, "매출세액에서 모든 매입세액을 공제한다"(부가세)는 주장을 이유 없다고 모두 배척했습니다. 단 한차례의 예외도 없습니다. 그런데 KBS가 주문상 승소한 이유는 "당사자가 제출한 자료에 의하여 적법하게 부과될 정당한 세액을 산출할 수 없어서, 과세처분 전부를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추계과세를 재부과 방법으로 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법원 판결, KBS 핵심 주장 모두 배척

이런 판결문을 눈앞에 두고도, 검찰은 "세액 재산정 가능성도 거의 없어'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상급심에서도 공사의 승소가 매우 유력하여 공사로서는 최소한 1심 승소금액인 1,764억원 상당을 국세청으로부터 환급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1심 판결이 상급심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3심 제도에서 각급 심의 독립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1심으로 끝내버리지 무엇하러 대법원까지 가는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매우 유력한' 가능성에 근거하여 1심 승소금액을 가지고 배임죄를 적용했는데, 상급심에서 1심 판결이 뒤집어지면 그때 '배임죄'는 어떻게 되며,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게 됩니까. 실제 1심에서 KBS가 승소한 두 건의 법인세 판결이 2심과 대법원에서 패소한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검찰은 이 경우조차도 1심 승소가액에 포함시켰습니다.

법무법인 율촌의 법률자문에서도, 경수근 변호사 수임료 사건을 판결한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에서도 이 사건 소송의 상급심에서 1심과 다른 판결이 선고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검찰은 이런 증거와 자료들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더군다나 배임액 산출의 근거가 되는 '1심 승소금액'이라고 계산한 1,764억원 가운데는 <> 96년도 법인세 자진신고분 158억원과 97년도 법인세 자진신고분 73억원은 대법원에서 패소 확정된 것이고 <> 95년도 법인세 자진신고분 299억원은 1심 패소액이며 <> 97-98 부가가치세 자진신고분 200억원은 패소와 승소가 겹친 금액으로, 승소금액에 포함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검찰이 얼마나 서둘렀으면, 얼마나 한쪽만 보았으면, 이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이른바 '승소금액'도 법원이 종전의 과세처분을 취소하라는 의미에서 '주문상 승소'일 뿐이지, 추계과세 방법으로 정당한 세액을 다시 산정하여 재처분해야 하는 대상의 금액일 뿐인 것은 위에서 이미 충분히 논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찰 공소장은 또 "서둘러 소송을 취하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공영방송 KBS가 처한 상황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KBS의 재정은 월드컵 호황을 누렸던 2002년을 고비로 구조적 한계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수입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수신료는 1981년에 월 2,500원으로 책정된 뒤 지금까지 동결되어 있고, 광고가 케이블, 인터넷 등 뉴미디어 쪽으로 급속도로 이동하면서 지상파 광고시장이 해마다 1천억원 안팎으로 줄어들어 광고수입은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구조적 한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상파 광고시장이 축소되면서 방송사간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면서 제작비는 무섭게 치솟았습니다. 2000년부터 4년간 제작비를 비교해보니 무려 53%가 늘어났습니다. 수입은 줄어드는데, 비용은 크게 늘어나는 구조적 한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디지털 전환과 HD 제작을 위해 1조원을 훨씬 상회하는 천문학적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KBS는 지상파 텔레비전 2개 채널, 라디오 7개 채널의 기본 방송운영에 더하여 한국교육방송(EBS)에 대한 수신료 지원과 송출 대행, 한민족 방송과 국제방송 등 국책방송, KBS 교향악단 운영 등 여러 국책 사업으로 연간 800억원 상당의 추가 부담이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적 한계 속에서 국세청으로부터 해마다 엄청난 액수의 법인세 추징금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KBS는 <> 매년 엄청난 금액의 법인세 추징금을 물어가면서 끝도 알 수 없는 소모적 재판을 계속 하거나 <> 아니면 합리적인 과세기준을 마련하여 KBS와 국세청 사이 분쟁을 이른 시일 내에, 그리고 근원적으로 없앰으로써 공영방송의 운영을 안정적으로 할 것이냐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책임 있는 경영적 선택

말썽을 피하고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회사야 어떻게 되건 소모적 재판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안이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정치검찰의 행태를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선택은 동시에 경영진에게 안전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배임사건이 알려지면서, 이처럼 안이하고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경영진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습니다. 안이하고 안전할지는 몰라도 참으로 무책임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KBS 경영진은 적극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집단의 지혜를 모으려고 범사적 협의체를 운영하면서 실무적 논의를 하였고, 또한 세무전문가와 법률전문가의 자문, 경영회의, 감사실의 일반 감사, 이사회 보고 등 필요한 절차와 과정을 모두 거쳐서 경영적 판단을 내리고, 공영방송 KBS를 위해 필요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KBS 재정의 구조적 한계 상황에서는 몇 백억원의 추징금은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돈으로 고품격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KBS가 6부작으로 만들어서 나라 안팎에서 크게 사랑을 받았고, 2007년 방송위원회 방송대상까지 받았던 '차마고도' 6부작 만드는데 15억원이 들었습니다. 그런 고품격 다큐멘타리를 수십개 만들 수 있는 돈(2005년 법인세 추징금은 367억원에 이르렀습니다)을 세금 추징금으로 그냥 내면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또다시 계속될 수밖에 없는 소송에 그냥 매달리는 것이 책임 있는 경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검찰, 한쪽 논리만 추종

"소송을 취하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다"니요. 공영방송 KBS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끝을 알 수 없는 소모적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 합리적인 과세 기준을 마련하는 것 이상의 '합리적 이유'가 또 어디 있습니까. 소송을 통해서는 그런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판결문에도 나오듯이 법원은 "적극적으로 합리적이고 타당성 있는 산정방법을 찾아내어 정당한 부과세액을 계산할 의무까지 지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한 터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이러한 KBS의 경영적 판단에 대해 엉뚱한 곳에 원인을 두고 저를 배임죄로 얽어매었습니다. 검찰은 제가 연임을 목적으로 적자를 모면하고자 서둘러 법원의 조정을 통해 세금 소송을 마무리 지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장으로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세금 문제를 다루게 된 계기는 2004.2 말에 98-2000년도분 법인세 609억원 추징통보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KBS 재정이 구조적 한계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법인세 추징은 엄청난 압박과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4년 2월말에 범사적 T/F를 구성하여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T/F는 5월초까지 네 차례 회의를 가졌고, 이 자리에서 소송 일변도 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뤘고, 끝을 알 수 없는 소모적인 소송 일변도가 아닌, 국세청과의 협의 또는 협상 등 다각적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제가 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 정도 지나서, 그리고 임기 만료 2년 여 전에 '다각적 방법의 모색'이라는 결론이 KBS의 범사적 협의체를 통해 나왔는데도, 검찰은 제가 '연임을 목적으로 서둘러 소송을 끝냈다'고 했습니다. 검찰 주장대로라면 저는 임기 만료 2년여 전부터 연임을 목적으로 소송을 끝내려 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검찰은 '적자를 없애기 위해 서둘러 무리하게 소송을 그만 두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범사적 협의체인 T/F가 구성된 2004년 2월말에는 2003 회계연도의 결산이 확정되는 때였습니다. 당시 2003년도 결산은 288억원 흑자였습니다. 적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때였습니다. 또 검찰은 서둘러 무리하게 소송을 그만 두었다는데, 2004년 6월부터 국세청과 본격 협의를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서울고등법원의 조정에 의해 매듭지어져, 그 기간이 무려 1년5개월이나 되었는데도, 서둘러 무리하게 했다니, 참으로 해괴한 셈법입니다.

검찰, 노사합의문도 왜곡

게다가 검찰은 만천하에 공개된 노사합의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슴치 않고 왜곡했습니다. 2005년 7월 22일 노사 합의문 2항은 '경영진은 작년 적자와 올해 경영위기가 발생한데 대해 직원 여러분께 사과하며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 임원 전원이 사장께 사퇴서를 제출하며, 올해 적자 발생시 4/4분기 내에 책임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합의문을 검찰 공소장 6쪽에서는 '...올해 적자 발생시 4/4분기 내에 경영진이 총사퇴한다'라는 내용으로 왜곡했습니다.

'책임지는 행위'에는 '사퇴'를 포함하여 감봉, 징계 등 여러 조치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책임진다'를 '경영진 총사퇴'로 둔갑시켰습니다. 저는 사장 재임중 국회 문광위에서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수없이 '책임지라'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2005년 초, 2004년 적자가 647억원으로 나오자 무능경영을 내세우며 책임지라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KBS 재정이 수신료 동결 등 구조적 문제가 있는 이상, 그것을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영방송 KBS의 존재 이유, 가치, 목적은 결코 일반 사기업처럼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저의 일관된 생각이었습니다. 품격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목적이고 존재 이유이지, 이윤을 내고 적자를 없애고 하는 것이 공영방송 경영의 목표가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노조에서 뭐라 떠들건, 회사 안팎에서 적자 경영이네, 무능 경영이네 비판을 했어도, 저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더러 '무능경영'을 했다는데, 제가 재임하는 동안, 공영방송 KBS는 여러 여론조사에서 영향력 1위, 신뢰도 1위였습니다. 그리고 방송위원회에서 주는 가장 큰 상인 방송대상을 4년 연속 차지하는 등 국내외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공영방송 경영에서 이 보다 더 값지고 알찬 경영이 있습니까.

성실 납세의무를 배임으로 모는 검찰

검찰 공소장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피고인은... 1,892억원 상당의 재산상 이익을 국가에게 취득하게 하고, 동액 상당의 재산상 손해를 공사에게 가하였다". 국가에, 더 구체적으로 국민에게 이익을 준 것이 배임인 셈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과 검찰의 공소 내용을 보면서, 검찰의 공소 자체에 근원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검찰의 논리는 기술적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국세청이 정확한 세액을 계산하여 부과하기 어려우니, 그 약점을 물고 늘어져서 끝까지 소송으로 가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법이 정한 4대 의무중 하나인 납세 의무를 가지고 있는 KBS가 국세청의 그런 약점을 소송을 통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세금을 내지 않고 빠져 나갈 방도를 강구해야지, 합리적인 과세기준을 마련하여 성실납세를 하면 경영자는 배임이 된다는 것입니다. 헌법에서 정한 4대 의무중 하나인 납세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것이 배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배임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새 기준에 따른 KBS의 납세로 인해 국가가 받은 이득은 부당한 것이어야 하고, 납세의무자인 KBS의 납세의무 이행은 KBS에 부당한 손해를 미친 행위여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정상적인 나라에서 있을 법한 일입니까.

그리고 부당한 것이라고 규정짓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한 기준은 이번 사건에는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거짓과 기망으로 가득 찬, 그리고 '매우 유력하다'는 승소 가능성에 의존한, 무엇보다 재부과가 실현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게 될 '1심 승소가액'이 결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검찰은 마땅히 공소를 취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무지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정치적 목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을 저지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끝으로 이 사건 고발인과, 그와 거의 일심동체로 저를 배임죄로 엮는데 역할을 한 KBS의 전 세금소송 대리인인 경수근 변호사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발인 조상운 전 KBS 직원은 오랫동안 세무 소송을 혼자 전담했고, 2004.2월에 T/F가 구성되기 전까지 재판 기록과 각종 세무관련 정보를 독점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3월말 정년퇴직 시기에 이르자 세무 소송이 종결될 때까지 연봉계약직으로 재고용을 요구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연봉조건과 승소할 경우 승소가액에서 일정 비율의 보상금까지 요구했습니다. KBS 직원으로 일하면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특혜를 요구하다니...저 뿐만 아니라 다른 임원들도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의 일을 한 개인에 의존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며,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구성원들이 활발하게 토론하면서 집단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야 말로 생명력 있는, 활기 있는 조직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무기획팀을 회사내 전문가들로 확대 개편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으며, 고발인 조상운씨를 재계약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조상운씨는 저를 배임혐의로 고발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배임혐의와는 정반대인 세금 포탈 혐의가 있다며 국세청에 진정서를 낸 적도 있습니다. 그는 2005년 11월 KBS와 공사가 법원의 조정으로 세금 분쟁을 해소하려 했을 때 국세청에 "국세청이 승소할 가능성이 있어, 환급해 줘서는 안 될 세금에 대해 환급을 해주는 것이 됨" "그런 결과 한국방송공사는 적법하게 납부할 세금을 포탈하는 행위를 하게 되고, 국세청은 임의로 국고 손실을 초래하는 행위를 하는 것임"이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똑 같은 법원 조정사안을 가지고 배임, 세금 포탈이라는 정반대의 모순된 주장을 한 셈입니다.

경수근 변호사는 KBS의 세무 소송관련 유일한 소송대리인이면서도 KBS가 법원의 조정을 통해 세금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 한사코 이를 반대했습니다. 1심 승소가 대법원까지 갈 것이 확실하고, 또한 국세청이 재부과할 수 없다며, 소송 당사자인 KBS의 요구에 강하게 불응했습니다. 고발인과 검찰 논리와 경수근 변호사의 논리는 판에 박은 듯 같았습니다. 세상에 무슨 변호사가 소송 당사자의 요구와 상황은 헤아리지 않고, 제 주장만 하는지, 그런 태도는 변호사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될 것입니다. 경수근 변호사는 이번 배임혐의 고발사건을 계기로 KBS를 상대로 세무 소송과 관련하여 86억 원에 이르는 수임료 소송을 청구했습니다. 그는 이에 앞서 15억원의 수임료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그의 주장의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지금도 국세청과 KBS 사이의 조정안이 양 당사자의 입장을 잘 반영한 가장 합리적이었다는 점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랬기에 법원도 조정을 권고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공영방송 KBS의 안정적 운영 뿐 아니라 상당한 절세효과를 가져오는 최선의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KBS가 법원의 조정을 통해 세금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구조적 한계 속에 놓인 KBS 재정상황에서 KBS에 엄청난 부담과 압박이 되는 과세관청과의 끝없는 소모적 분쟁을 종결짓고, 합리적인 과세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그래서 공영방송 KBS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경영적 판단에 따라 취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영적 판단과 경영 행위를 두고, 국세청의 재부과 가능성까지 원천적으로 부정하면서, 심지어 국가와 국민에 이득을 줬다는 이유로, 저에게 무시무시한 배임죄를 적용했습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법의 이름으로 가능합니까. 정치적 목적 이외에 달리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 주소입니다.

검찰의 포괄적 권력 남용을 지금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곳은 법원이며, 그래서 법원의 역할과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도, 역사의 시계가 몇 십 년 전으로 역류해 버린 지금의 이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 믿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실패와 패배조차도 역사 발전과 사회 진보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을 저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참된 것과 옳은 것을 위해, 민주주의 가치와 인간 권리를 위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몸을 던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법정에서도 그런 희망과 믿음과 낙관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될 것이라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9.6.22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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