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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안티폭스’

‘9·11 사태는 부시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보도하지 말 것’, ‘오늘은 낙태 문제를 특집으로 방송할 것’, ‘자살 폭탄은 좀 더 부정적 의미가 강한 살인 폭탄으로 표현할 것’….

매일 아침, 방송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지시가 내려온다. 심지어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가려야 하는지도 간섭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는 주로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 이뤄진다. 특정 정당의 이익은 고스란히 방송을 통해 대변된다. 군부 독재 시절 우리 언론에 내려진 ‘보도지침’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상상이 되는가. 21세기, 그것도 그 어떤 나라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하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세계적인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폭스 TV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로버트 그린왈드는 지난 2004년 80분짜리 다큐멘터리 <안티폭스: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전쟁>을 선보였다. <안티폭스>는 무려 전 세계 인구의 3/4인 47억 명이 시청하는 폭스 TV가 어떻게 미국 공화당의 이익에 봉사하고, 극우 편향적 시각을 전달하는지 폭로했다. 과거 폭스 TV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공정하고 균형 있는 방송’(Balance & Fair)을 강조하는 폭스 TV의 ‘가면’을 벗겼다.

그들은 “폭스 TV가 공화당이 바라는 일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간부들은) 매일 아침 그날 방송의 분위기에 대해 지시”했으며, “사람을 만나거나 메일을 보낼 때도 윗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고 털어 놓았다. 월터 크롱카이트 전 CBS 앵커는 “폭스 네트워크는 극단적 우파 조직”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 로버트 그린왈드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안티폭스>.
특히 선거 기간 폭스 TV는 그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폭스 TV는 수석 정치부 기자의 부인이 부시 캠프에서 선거 운동을 해도 개의치 않았고, 그에게 부시 인터뷰를 시켰다. 부시의 상대 후보에 대해선 부정적 모습을 부각했고, 비방을 일삼았다.

“선거 유세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 공방이 TV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사람들의 평가였고, “폭스 TV를 보는 것은 공화당의 전속 채널을 보는 것”이란 반응도 나왔다. 논점 흐리기, 사실과 의견 섞어 쓰기, 상대와 논쟁하는 대신 중상모략하기 등이 폭스 TV가 자주 쓰는 전략이었다.

‘공정하고 균형 있는 방송’을 표방하는 폭스 TV는 ‘언론’의 탈을 썼지만, 공화당의 정책을 전파하는 ‘선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클린턴 정부 시절 ‘감시견’ 역할을 하던 폭스 TV는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세 충실한 ‘애완견’으로 모습을 바꿨다.

폭스 TV의 실체를 폭로한 <안티폭스>가 제작된 지 5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정부·여당에서 대기업과 신문이 지상파를 비롯해 종합편성 채널, 보도전문 채널 등 방송에 진출할 수 있게 하는 언론관계법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폭스 TV와 공화당이 보여주는 언론과 정치의 ‘노골적인’ 결탁은 우리에게도 상상 가능한 현실이 됐다. 루퍼트 머독과 같은 미디어 재벌이 탄생하지 말란 법도 없다.

지난 2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문화행동’에 참석한 양승동 KBS PD가 시민들과 함께 <안티폭스>를 본 후 “한국의 언론 상황을 예언하는 것 같아 섬뜩하다”고 한 것이 괜한 말이 아니다.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특정 세력이 언론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실 왜곡은 물론 교묘한 방법으로 선전선동을 일삼는다면?

<안티폭스>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그래서 귀 기울일 만하다. <안티폭스>에서도 지적했듯 이 문제는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다. 지금보다 형편없는 민주주의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 영화는 되묻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걸 멈추게 하는 것도, 바꾸는 것도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지금이다. 달려가서 화가 났다고 외쳐라.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소리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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