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법 직권상정과 역린(逆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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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법 직권상정과 역린(逆鱗)
[기자칼럼]
  • 김세옥 기자
  • 승인 2009.07.21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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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상정’이란 이름의 폭탄 위에 장착된 시계 바늘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 여당은 국회의장의 결단을, 야당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철회를, 국회의장은 여야의 합의를 촉구하고 있지만 2~3일 후면 폭탄은 터지고 말 것이라는 게 여의도 정가 주변의 대체적 관측이다.

폭발의 시간은 다가오지만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본회의장 동시 점거라는 사상 초유의 코미디를 보이면서까지 여야가 전쟁을 하고는 있지만, 정작 무엇을 놓고 전쟁을 벌이려는 건지 말이다. 지난해 12월 언론관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일주일 만에 직권상정을 통해 처리하려다 여론의 된서리를 맞았던 여당이 이번엔 최종안을 국회에 제출하지도 않고 협상 과정에서 공개한 후 이에 대한 상임위 차원의 논의도 없이 직권상정을 하겠다며 스위치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여당 최종안은 21일 오후에야 나왔다. 민주당 등의 여론독과점 우려를 ‘최대한’ 고려했다는 여당의 최종안 주요내용은 신문·대기업의 지상파(10%), 종합편성·보도전문채널(30%) 진출을 허용하되 2012년까지 신문·대기업의 지상파 방송 경영(지역지상파 제외)은 유예하자는 것이다. 또 구독률 25% 미만의 신문사들에만 방송 진출을 허용하는 진입규제 장치와 함께 방송시청점유율 30% 상한 규정을 도입했다. 이때 방송에 진출한 신문의 구독률을 시청점유율로 변환(10% 상한)키로 했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일견 그럴 뿐이다. 먼저 여당은 서울 지역 지상파 방송의 경우 신문·대기업의 10% 지분소유를 허용하면서 경영만 2012년 이후로 유예했는데, 5% 미만의 지분으로도 그룹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한국 기업의 현실 등에 비춰봤을 때 실효성이 있는 장치라고 보기 힘들다는 게 언론계 안팎의 중론이다.

또 언론관계법 개정 논란의 핵심은 신문의 보도기능을 포함하는 방송에의 진출, 구체적으로 종합편성 채널 진출인데, 여당의 안대로 구독률을 기준으로 할 경우 사실상 조·중·동의 방송 진출은 당연히 가능해진다. 구독률이란 전체 신문 시장 안에서 특정신문이 차지하는 비율로 조·중·동의 경우 9~10% 수준이다. 언론법 개정과 관련한 국민들의 여론독과점 우려를 하나도 해소하지 않은 채 해소했다고 주장하는, 눈속임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밖에도 독일의 시청점유율 상한 개념을 처음으로 법안에 반영한 이용경 창조한국당 의원은 “여당 수정안의 시청자점유율 30% 상한은 신문·대기업 누구든 방송에 진입, 현재의 MBC·SBS 점유율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점유율을 보장하겠다는 여론독과점 보장법”이라고 비판했다.

창조한국당의 법안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시청자점유율을 기준으로 신문의 방송 진입을 보장하는 진입규제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여당의 수정안은 이 같은 진입규제의 의미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30%라는 수치만을 가져왔을 뿐, 바다를 건너 귤을 탱자로 만들어 놓고도 귤이라 우기는 형국인 셈이다.

이처럼 상호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 산적함에도 여당은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 4일을 앞두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결단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을 뿐이다. 수정안에 대한 국민의 이해도, 야당의 어느 정도의 동의도 필요 없다는 태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민은 지금 자신 앞에 놓인 게 모자인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고 있는 여당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난달 18일 나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마따나 “미디어법은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이해나 설득을 시키려는 노력보단 계몽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GDP 왜곡과는 상관없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법 개정이라 주장하고 있는 만큼, 그 주장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반발 정도는 무시해도 좋다고 보는 것일까.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중국 춘추시대 말기 사상가 한비(韓非)의 말을 인용, 정치 권력자들이 경계해야 할 오류를 지적했다. 책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한비는 용과 마찬가지로 군주에게도 역린(逆鱗)이 있어 이를 잘못 건드리지 않아야 유세(遊說), 다시 말해 군왕을 설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현재에 접목해보자.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시대인 지금, 이 역린은 군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 국민을 잘못 건드리지(무시하지) 않고 설득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는 이 역린을 건드린 정치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으로 쓰여 왔다. 여당이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구하기 전,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결단하기 전 한 번쯤 곱씹어야 할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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