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 장르의 일관성과 감상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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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따져보기] 조민준 한겨레 ‘ESC’팀 객원기자

영화 〈친구〉(2001)의 한 장면. 준석(유오성)이 폭력단의 신입 조직원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사이, 동수(장동건)는 패거리들을 이끌고 자신을 해치려 했던 도루코(김정태)를 습격하여 복수한다. 이 두 상황은 교차 편집으로 구성했는데 마치 훈련소의 조교와 같은 태도로 칼 쓰기를 가르치는 준석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칼 쓰기의 방식을 고스란히 사용하여 도루코의 일행들을 습격하는 동수의 장면을 일관되게 병치했다.

이 장면의 방점은 준석의 ‘조교와 같은 태도’에 있다. 군사문화와 깡패들의 폭력은 이 장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등가의 것으로 묘사된다. 이야기를 확장해보자. 영화 〈대부〉(1972)의 후반부 시퀀스에는 마피아의 보스인 마이클(알 파치노)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사이 조직원들은 적대세력을 숙청하는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이 이 장면에 대해 ‘종교의 역사=마피아의 역사=미국의 근대사’라는 삼면등가의 은유를 읽었다. 아마도 〈대부〉의 이 시퀀스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친구〉의 장면을 우리는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군사문화의 역사=조폭의 역사=한국의 현대사’

80년대 이후 현대 한국의 공기를 예민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영화 〈친구〉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낳는다. 그리고 이는 최근 〈친구, 우리들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각색된 드라마를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마치 주석서처럼 영화 〈친구〉의 컨텍스트를 오밀조밀하게 재구성한 이 작품에서 각본과 연출을 맡은 곽경택 감독은 원작에서보다 시대의 공기를 확연하게 담아내는데 주력했다.

진숙(왕지혜)의 아버지는 월남 파병용사였지만 귀향 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대학시절 학보사에서 일했던 상택(서도영)은 학생운동의 경력 때문에 군 복무 시절에도 고통을 당했다는 등의 과거사들이 새롭게 보강되었다. 이로써 드라마와 영화를 아우르는 텍스트로서의 〈친구〉는 ‘80년대 건달의 성장사에 비친 대한민국’이라는 알레고리가 된다.

애초 이 작품의 장르가 ‘갱스터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대 현실의 묘사라는 장치는 기능적으로도 유효하다. 한 인물이 악의 순환 고리에 빠져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갱스터물의 기본적인 포맷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순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현실의 기반이란 얼마나 취약한지를 고발하는 것이 결국 갱스터물의 요체. 그러므로 지극히 폭력적이었던 시대, 80년대라는 장치가 더없이 어울리는 장르 또한 갱스터물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친구〉는 그 다음 수에서 패착을 두었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정이라는 테마가 부각되고

▲ 조민준 〈한겨레〉 ‘ESC’팀 객원기자
순수했던 유년의 기억이 환기되면서 시대의 공기는 결국 감상주의와 부딪힌다. 시대 상황과 갱스터 장르의 포맷, 그리고 화자의 감상적 태도는 서로 충돌하며 극의 메시지를 희석시켰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건조하게 묘사된 80년대 풍경은 신파적이고 감상적인 인물들의 개인사의 들러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숙명처럼 인물들을 짓눌러야 할 폭력의 시스템은 개인의 사랑과 우정, 배신이라는 신파적인 설정 앞에서 퇴색되고 만다.

여기에 〈친구, 우리들의 전설〉이 가지고 있는 장르와 화법의 모호함이 있다. 그리고 유의미한 성취가 존재하는 만큼 아쉬움 또한 적지 않다. 따지고 보면 장르적 일관성을 따르지 않는 대개의 한국 영화나 드라마들의 숱한 패착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애초 〈친구, 우리들의 전설〉 또한, 단지 담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도 많은 작품이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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