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책읽기- 밀란 쿤데라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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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의 책읽기- 밀란 쿤데라의 ‘향수’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갈망과 좌절
  • 승인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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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밀란 쿤데라. 그는 나에게 작품의 이름을 가장 잘 짓는 작가로 기억되어 있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아직도 이렇게 근사한 책 제목을 접한 적이 없다). 그의 작품을 언제 처음 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머리 속에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베를린 장벽 붕괴’ 등이 연상된다. 그를 만난 것이 아마 그 즈음이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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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꿈을 꾸는 이들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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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8|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거대담론이 위용을 부리던 80년대 말, 쿤데라의 소설은 그 거대담론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에게 내밀한 위안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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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1|그의 작품은 삶과 유리된 이념의 허구성을 까발리는 동시에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삶의 보편적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 보편적 풍경이란 진실한 사랑과 자유, 행복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짓누르는 이데올로기와 권력, 탐욕과 기만, 그리고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상처받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고통받고 좌절하는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반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과 그들 편에 선 뻔뻔한 지식인들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서 늘 승자의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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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4|1968년 체코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좌절과 망명의 고통을 겪었지만 국가 사회주의가 몰락한 1989년 이후에도 자신들의 ‘조국’에서 ‘꿈’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현실에서는 ‘승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68년에 그들을 탄압했던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89년 이후에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찬미자로 변신해 승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두 인간 군상을 갈랐던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꿈을 꾸는 자’와 ‘현실을 쫓는 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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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7|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갈망과 좌절. 쿤데라의 작품에 베 있는 이런 기조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완벽한 이상을 꿈꾸었던 작가의 꿈과 좌절, 그에 이은 망명의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 현실에 비춰볼 때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비판도 없진 않았지만 그의 작품은 지난 세기 우리가 걸어 온 길을 돌이켜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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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0|체제와 이념은 다르지만 쿤데라가 그리고 있는 체코의 현실은 우리의 역사와 너무나 닮았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가 늘 승자가 되는 현실, 그 현실 속에서 변신에 능란한 지식인들은 어느 틈엔가 승자의 편에 서 있고, 꿈꾸는 인간은 좌절하고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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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5|고향에 갈 수 없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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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8|‘가진 자’, ‘뻔뻔한 자’들이 ‘꿈꾸는 인간’을 짓밟는 방식 또한 체제와 이념을 초월해서 꼭 닮았다. 단지 ‘트로츠키주의자’, ‘빨갱이’라는 딱지만이 달랐을 뿐. 어느 사회에서나 권력자들은 이분법을 좋아한다. ‘나’ 아니면 ‘적’. 그 ‘적’은 어느 틈엔가 사회의 ‘공적’으로 윤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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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1|이런 부조리한 현실에서 쿤데라는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체코의 현대사는 한바탕 ‘농담’같은 것”이라고, 지난 세기 완벽함과 영원을 추구했던 ‘불멸’의 가치관(근대 이성이 낳은 유토피아. 이는 공산주의의 이상일 수도 있고 완전 자유경쟁 시장일 수도 있고 테크노피아일 수도 있다)이 실은 삶의 소중한 행복을 짓밟았노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멸’을 꿈꾸기 보다(미래의 완벽한 이상을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기보다) 순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인생의 참 행복을 느끼며 살라고, ‘느림’의 미덕을 배우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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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4|그런 그가 고희를 넘어 ‘향수’라는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신선함이나 위안은 없었지만 ‘고향에 갈 수 없는 슬픔’을 관조하는 그의 노년이 정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생이라는 여행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사람들은 목적지(잃어버린 고향, 꿈)에 도착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갖은 노력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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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7|하지만 어쩌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길 위의 삶’ 그 자체가 인생에서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 지도 모른다. 마치 망명객으로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위로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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